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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상남도

한국인의 10분의 1정도를 차지하는 김해 김씨의 시조가 묻힌 수로왕릉

 

 2000여년 전 가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리에게 가야는 삼국유사에 남아 있는 몇줄의 글귀로 남아 있을 뿐이니...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 더불어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었다던 가야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김해의 몇몇 유적지로 금관가야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2010년 6월 22일 다녀온 김해 수로왕릉의 모습입니다.

 수로왕릉 입구의 숭화문

 숭화문 앞에는 사적 73호로 지정되어 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숭화문을 지나면 신성구역을 나타내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중앙의 길은 신도이니 바깥쪽으로 통행하라는 안내문이 있습니다.

 홍살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가락루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납릉의 정문과 그 뒤의 납릉을 볼 수 있습니다.  

 가락국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을 모신 무덤으로 왕궁(봉황대)의 동북쪽 평지에 조성되어 있는데 원형봉토분으로 높이는 약 5m입니다.

고려 문종 때까지의 제사 기록이 가락국기에 전하고 있습니다.

비문에는 <가락국수로왕릉>이라 적혀 있으며 1647년(인조 25년)에 왕명에 의해 묘비를 세웠고, 1865년(고종 2년)에는 숭선전을 중수하였습니다.

  납릉정문 왼쪽으로는 숭선전 비에 기록된 가락국 역사를 1927년 추려 새긴‘중건신도비명’을 비롯한 신도비 3개가 서 있고, 숭신각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납릉의 오른쪽으로는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춘추제례를 모시며, 제물은 익히지 않은 날 것을 사용하는 것이 특이합니다.

숭선전 옆에는 안향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824년에 건립되었고, 춘추제례에 사용할 향과 촉을 국가에서 하사받아 보관하는 곳입니다.

 

가야는 약소국으로 알려졌지만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가야는 신라와 낙동강을 동서로 두고 자웅을 겨루던 사이로서, 신라는 가야와의 싸움을 생각보다 힘겹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사료에서도 이러한 사실들을 군데군데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3년 기사를 보면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이 국경문제로 다투다가 신라왕에게 찾아와 결정해 줄 것을 요구한 기사가 있습니다.

이에 파사이사금은 쉽사리 결정을 못 내리고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하여 초청하여 이 문제를 물었습니다.

수로왕이 의견을 내어 음집벌국 편을 들어주어 결정이 나자 신라에선 귀족들로 이뤄진 6부에서 수로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6부 중 5부에서 이찬(伊湌 : 신라 17관등 중 둘째 등급)을 우두머리로 보내었는데, 한기부만 직위가 낮은 자를 우두머리로 보냈습니다.

이에 수로왕이 노하여 부하인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라는 이에 대해 가야에게 아무런 말도 못하고 오히려 음집벌국만 공격하고 말았다고 하니, 이를 보면 신라와 가야간의 관계에서 가야가 좀 더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해석해 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금관가야가 이런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교역을 통한 재화의 확보를 들 수 있습니다.

회현리패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김해지역은 지금처럼 평야지대가 아니라 시내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다 보니 애초에 농사로 국가를 운영하기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중계무역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막강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이나 양동리고분군에서 발견되는 교역물품들을 보면 당시 활발한 무역이 이뤄졌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교역 대상은 주로 낙랑군과 왜였다고 합니다.

중계교역은 물론이거니와 철을 교역품으로 사용해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철은 고대시대에 화폐처럼 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철제 무기나 갑옷, 농기구를 만드는 중요한 원료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금관가야는 이런 활발한 교역과 뛰어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신라를 압박할 만큼 강한 국가일 수 있었습니다.

 
                          < 오마이 뉴스에서 발췌 >

 가락국 2대에서 9대까지의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곳인 숭안전이 숭선전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2대 도왕, 3대 성왕, 4대 덕왕, 5대 명왕, 6대 신왕, 7대 혜왕, 8대 장왕, 9대 숙왕의 신위와 왕비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숭선전과 숭안전 앞쪽으로는 춘추제례에 필요한 제수를 만들거나 보관하는 곳인 진사청이 있습니다.

 

 

 납릉의 앞쪽 왼편에 위치한 경모문과 그 뒤의 서재, 동재등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사람이 거주하는 듯합니다.

출입할 수 없는 곳입니다.

 

 경안문의 오른편에는 연못과 그 뒤에 유물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평지에 조성되었다는 수로왕릉..

그곳에 서면 멀리 분성산이 보입니다.

 

2000여년 전 김해는 금관가야라는 찬란한 역사가 500년간 꽃 피웠던 곳입니다.

마음을 열고 천천히 돌아보면 이곳에 그 시절의 역사가 아직 숨 쉬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수로왕과 허황옥의 국경을 넘은 사랑이야기..

사다함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지는 왕국의 이야기.

귀 기울여보면 그밖의 다른 이야기들이 들려오지 않을까? 하여 먼산을 바라보며 저물어가는 오후를 이곳에 서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