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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수몰 될 뻔 했던 문화유산 - 청풍문화재단지

2008년 2월 20일, 제천의 금수산을 가기로 하고, 나서는 길.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안개가 가득입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금수산을 오른다한들 전경이 안개에 묻혀 있을 듯 합니다. 일행은 상의를 한 후에 일단 청풍문화재단지, kbs촬영장,금월봉을 가고 안개가 걷히는 것을 봐서 금수산을 가기로 합니다.

 청풍문화재단지의 전경 - 망월산성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정부의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으로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1978년 6월부터 시작하여 1985년 10월준공되기까지 수몰지역내의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1983년부터 3년여에 걸쳐 1만 6천평의 부지위에 원형대로 이전 복원하여 1985년 12월 23일 개장한 곳이랍니다.  보물 2점(한벽루, 석조여래입상), 지방유형문화재 9점(팔영루, 금남루, 금병헌,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4동), 지석묘, 문인석, 비석등 42점과 생활유물 2천여점이 보관되어 명실상부한 옛 남한강 상류의 화려했던 문화의 산실로 자리잡고 있는 곳입니다.

 청풍문화재단지 입구의 정승 - 왼쪽 맨 끝의 정승 머리에 앉은 동자승이 독특해서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팔영루

 

1976년 12월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된 곳으로 제천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청풍부(淸風府)를 드나들던 관문이다. 팔영루라 부르는 것은 고종 때 부사 민치상(閔致庠)이 청풍팔경(淸風八景)을 읊은 팔영시(八詠詩)가 있기 때문이다. 숙종(肅宗) 28년(1702)에 부사(府使) 이기홍(李箕洪)이 창건하고 현덕문(賢德門)이라고 한 것을 고종(高宗) 7년(1870)에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중수하였다. 본래의 문루는 높이 10m 가로 10m 세로 6m의 크기였다. 그 후 1969년 해체 복원 공사를 하고 1970년과 이듬해 두 번에 걸쳐 보수하였다. 1983년 충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을 피해 청풍면 읍리(邑里)에서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청풍문화재단지의 정문으로 이용되고 있다.
건물 구조는 높이 2.2m 석축기단을 쌓고 그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이다. 북측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면 작은 문 안에 성의 누문답게 홍예를 쌓은 높은 대를 딛고 우뚝 서 있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다. 민치상이 쓴 팔영루라는 현판이 정면 중앙에 걸려 있고 층계 입구에는 사적비가 남아 있다. 처마는 겹처마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누각을 받친 석축의 중앙에 4각의 출입문을 냈으며 출입문 천장에는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퇴색하여 겨우 원형을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으나 복원하였다. 이 호랑이 그림은 구전에 의하면 청풍의 재난(수해)를 막기 위하여 그려졌다하며 호랑이 꼬리가 청풍 밖으로 되어 있어 호랑이가 먹이를 먹고 청풍밖으로 배설하여 청풍에는 큰 부자가 없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마지막 호랑이 이야기는 재미있지않으세요?

 석물군

 

문화재단지 조성 당시, 고대 사회의 장례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선사시대 무덤인 지석묘 5점과 문인석 6점, 조선시대 군수나 부사의 공덕비, 송덕비, 선정비 21점 등 비지정문화재 31점을 옮겨 놓았으며, 97년 제천 향교에서 비석 10점을 추가로 옮겨 이곳에 배치함으로써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남한강변의 비석문화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잇는 곳입니다.

                

 고인돌 - 고인돌은 선사시대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이 고인돌은 충주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청풍면 황석리 지역에서 옮겨온 남방식 고인돌이라고 합니다.

 특히 이 고인돌은 하늘의 별자리로 보이는 성혈이 새겨져 있어 특이한 것이라고 합니다.  2500여년의 세월을 거치며 풍화작용에 의해 다른 별자리들은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지만 북두칠성과 북극성 자리는 남아 있다고 하는데, 사실 저는 잘 모르겠더군요.

 한벽루

 

보물 제 528호, 고려 충숙왕 4년(1317년)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여 관아에 세운 독특한 양식의 부속 목조 건물로 연회장소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종 7년(1870) 부사 이직현이 중수하였고, 1972년 수해로 건물일부가 유실 되어 1976년 다시 복원하였다. 특히 루에 올라갈 때 계단 역할을 하는 '익랑'은 현존 건축물로써 전무한 양식이고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친필이며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하륜의 기문도 유명하나 72년 수해 당시 유실된 것을 2001년 복원하였다.

 

익랑이라고 불리우는 누각 옆의 작은 누각이 참 독특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인 듯 합니다.

 한벽루에서 바라본 망월산성

 

망월산성은 지방 기념물 93호로 새로 가설된 청풍대교 남쪽 망월산(해발 373m) 의 정상부와 지맥을 둘러 쌓은 석성지로 둘레가 495m의 작은 성인데 문지는 북쪽에 너비 3m의 것이 1개소 있고,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서남편에 너비 16m,높이 3m의 성벽과 남쪽에 너비 15m 높이 4.6m의 성벽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성내에서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토기, 기와조각이 몇 점 발견된 바 있으며, 삼국사기에 신라문무왕 13년(673)에 사열 산성을 더 늘려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인 삼국시대에 축성되었으리라 보여진다.

 한벽루에서 바라본 전경 - 충주호와 충주호 유람선 선착장 

 응청각 - 지방 유형 문화재 90호

 조선말 목조 8작 기와 초익공으로 건축되었으며 한벽루 좌측에 잇던 건물로 석축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세운 2층 누각으로, 하층은 단주, 상층의 측면간은 각주, 전면간은 단주를 세웠다. 하층은 기둥 사이에 흙벽을 쳐서 창고 등으로 사용한 듯 한데 어간과 촤측 협간 내부에는 토석이 가득 쌓여 있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고 관아의 부속건물로 용무차 내려온 중앙관속들의 객사로 사용하였던 곳이라고 합니다. 후편에 관수당이란 현판이 있으며 이곳은 객사에 머무르는 중앙관속들이 술을 들면서 물에 비친 야경을 감상하던 곳으로 달이 하늘에 뜨고 강물에 뜨고 술잔에 뜬다고 하여 야간풍경을 만끽하던 곳이라 전해진다고 합니다.

 

달이 하늘에 뜨고, 강물에 뜨고, 술잔에 뜬다..... 참 멋진 표현이지요?

금병헌 - 지방 유형문화재 제 34호

일명 명월정 또는 청풍관이라고도 하며 조선 숙종 7년(1681)에 부사 오도일이 창건하고 영조 2년(1726) 부사 박필문이 개축하였으며, 건물 구조는 정면 6칸 측면 3칸 건평 132m 의 팔작지붕 목조건물이다. 청풍부의 동헌으로 부사의 집무 장소 및 집회장소로 쓰였던 곳으며 유일하게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로 당시 행정관의 검소한 생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금병헌의 뒷 자태...

 

 

                                     

 망월 산성 가는 길에 만난 연리지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세월이 지나면 서로 합쳐져 한나무가 되는 연리지---- 두몸이 한몸이 된다고 하여 흔히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과 비유된다고 합니다.

 망월 산성에 올라서니, 깃발만 펄럭이고 있습니다. 그래도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의 서슬이 기개가 있어보입니다.

 망월산성의 정상을 지키고 있는 망월루 - 청풍호반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약 500m에 위치해 가벼운 등산을 하고나면 도착하는 곳입니다.

 망월루에서 바라본 청풍호반 전경

망월루에서 바라본 청풍문화재단지와 청풍대교

 청풍대교와 제천 신선봉 자락

 제천 청풍 금남루- 지방 유형문화재 제 20호

청풍부의 아문으로 도호부절제아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순조 25년에 청풍부사 조길원이 처음 세우고 현판도 걸었다고 합니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조성으로 1983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정면 3칸, 축면 2칸의 팔각집으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세운 2층의 다락집입니다.

                                          

 청풍석조여래입상 - 보물 제 546호

 

청풍면 읍리 대광사 입구에 있던 높이 3m 41cm의 거대한 석불로서 신라말 고려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당초에는 불상각이 없었으나 이전 시 불상각을 새로 지었다. 머리는 소발위에 육계가 있고 미간에 백호의 흔적이 완연하다.

구전에 따르면 입상 앞에 있는 둥근돌을 본인의 나이만큼 남자는 오른쪽으로, 여자는 왼쪽으로 돌리며 기원을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고유의 놀이인 고누 - 자연석 돌을 고누 판으로 만들어 곳곳에 두었습니다.

 수산 지곡리 고가 - 지방 문화제 89호

이집은 원래 수산면 지곡리 웃말에 있던 민가 주택이었는데,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 지금의 잘리로 옮겨 복원된 것이라고 합니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고 안채는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이다. 사랑채와의 사이를 담장으로 경계를 이루고 사랑채로 연결하는 관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꾸며져 있다.이집의 행랑채의 구조 및 부엌의 배치 등은 지곡리 마을의 특징 있는 일반형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곡리 고가에 들어서니 새끼틀

 마루 위의 살림살이와 물레가 정겹기만 합니다. 옛날 시골 할머니 집에서 보던 것들이라 더욱 반갑기만 합니다.

 뒷란의 장독대

 

            

 도화리고가

조선말 150-200년씩 된 목조 건물로 청풍면 도화리에 있던 것을 1985년 문화재단지로 이전 복원한 ㄷ자형의 고가이다.

 

 고가의 커다란 목련나무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꽃눈이 올라와 있습니다. 봄이 이제 멀지 않은 듯 합니다.

 

 고가 풍경들

                                            

 손 때 묻어 반질반질한 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