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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다는 백제 미학의 상징적 유물인 부여 정림사지

 

 

 

부여답사에서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정림사터 오층석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림사탑은 멀리서 보면 아주 왜소해 보이지만 앞으로 다가갈수록

자뭇 웅장한 스케일도 느껴지고 저절로 멋지다는 탄성을 지르게 한다.

...

만약에 안목있는 미술사가에게 가장 백제적인 유물을 꼽으라고 주문한다면

서산마애불,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산수문정 등과 함께 이 정림사 오층석탑이 반드시 꼽힐 것이며,

나에게 말하라고 한다면 정림사 오층석탑이야말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다는 백제 미학의 상징적 유물이라고 답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100개의 유물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명작인 것이다.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회상의 백제형-부여편 중에서

 

유홍준님이 말씀하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다는 백제 미학의 상징적 유물,

극단적으로 말해서 100개의 유물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명작이라 칭송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만나러 갑니다. (2012년 8월 17일)

 

 

 

 

"잃어버린 왕국"이라 불리우는 백제..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 중 가장 문화가 발달한 국가였다는 백제는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이야기만 남긴채 잃어버린 왕국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 백제의 도읍이었던 부여의 한가운데

석탑과 석불만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림사지..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연지와 석탑, 그리고 석불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석탑과 석불 둘레로 절터가 발굴되어 있습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만나러 가는 길,

길게 늘어선 기와담장..

 

예전에 사비성 부여의 한가운데 얼마만한 절집이 자리하고 있었을지 상상이 됩니다.

 

 

 

 

등굽은 소나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

 

 

 

 

그 소나무 아래 이녀석을 발견하고 웃음 짓습니다.

이곳은 여전히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 되고 있는

살아있는 공간이로군요^^

 

 

 

 

백제는 475년 웅진성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 사비성 부여로 천도하여

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할 때까지 부여는 백제의 수도였습니다.

 

새롭게 설계한 계획도시 부여~

왕궁과 관아를 비롯하여 중앙, 동,서, 남, 북 등 5부로 가지런히 나누고

그 안에 주거지를 만들고..

 

1,500년도 전의 부여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번화한 곳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삼국사기는 백제가 사비천도 이후 왕성 내에

왕흥사, 칠악사, 천왕사, 도양사, 백석사, 자기사 등 많은 절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무렵에 교류한 중국의 역사서인 북사(北史) 주서(周書) 백제 전에도

 '절과 탑이 매우 많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당연합군과의 전쟁과 3년여에 걸친 부흥군의 전쟁 등으로 잿더미가 된 사비성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한군데도 정확한 절의 위치도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왕흥사지, 군수리 절터, 정림사지..

이렇게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국보 제9호인 정림사지 오층석탑..

 

굳이 유홍준 교수님의 말씀을 빌리지 않아도

단아하고 아름다운 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를 '잃어버린 왕국'이라 불리운다고 위에서 말씀드렸었지요.

이곳 정림사지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왜 그리 불리우는지 말해봅니다.

 

이곳 정림사지는 사적 301호라고 하지요.

이곳은 오랫동안 '평백제탑'이라고 불리웠다고 합니다.

 

 

 

 

그것은 1층 탑신에 새겨놓은 당나라 장군 소정방의 전승기념문인

'대당평제국비명'이란 격문때문이었지요.

 

패망한 백제의 아픈 역사이지요.

 

 

 

 

그러다  일제 강점기이던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태평 8년은 고려 현종 19년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고려시대 이곳이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백제시대에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웠을지 모르는 석탑이지만

이 석탑은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존하는 삼국시대의 석탑으로는 정림사지 5층 석탑 외에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신라의 분황사 석탑(국보 제30호)이 있습니다.

 

 

 

 

우현 고유섭 선생은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인 익산 미륵사탑은 목조탑파를 충실히 모방한 것으로

다만 재료를 돌로 한 목탑이라고 할 수 있음에 반하여

정림사탑은 이제 목조탑파의 모습에서 떠나 석탑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획득하는 단계로 들어선 기념비적 유물로 평가하였다"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회상의 백제형-부여편 중에서

 

 

 

 

헌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 그러나 단정한 몸가짐에 어딘지 지적인 분위기

절대로 완력이나 난폭한 언행을 할 리 없는 착한 품성과 어진 눈빛,

조용한 걸음걸이에 따뜻한 눈인사를 보낼 것 같은 그런 인상의 석탑이다.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회상의 백제형-부여편 중에서

 

 

 

 

석탑 뒤쪽으로는 석불좌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석불좌상이 모셔진 곳에서 바라본 석탑의 모습..

 

 

 

 

석불좌상은 불에 타고 심하게 마모되어 대좌와 불상이 형체만 남아 있습니다. (보물 108호)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진리를 나타내는 비로자나불상으로 짐작됩니다.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입니다.

대좌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단정하면서도 균형있는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고려 초에 절을 다시 세울 때 백제시대의 강당 자리를 금당으로 삼아

이 석불을 주존불로 모셨습니다.

남원 만복사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문지, 금당, 강당, 회랑들이 있던 자리..

 

 

 

 

정림사지 가람 배치도를 통해

이곳에 있던 절집을 상상해 봅니다.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만나러 정림사지 박물관으로 향합니다.

정림사지 바로 옆에 자리한 박물관

 

 

 

 

박물관 벽면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도깨비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오래전의 정림사지의 모습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1910년의 모습, 1915년의 모습,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정림사지의 모습들이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정림사지를 가람배치에 따라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정림사지는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인 백제 전형의 1탑1금당식 가람배치 구조입니다.
이 가람 배치 구조는 고대 일본 가람조영의 모태가 되어 백제와 동일한 일본의 사천왕사(시텐노지. 四天王寺) 양식을 낳았습니다.
정림사지는 복도가 건물을 감싸는 배치 형태입니다

 

 

 

 

하지만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이 아닌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입니다.

또한 중문 바깥에는 동·서 양쪽으로 각각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최고(最古) 연못이며 이러한 연못의 존재는 삼국시대 사찰 조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하지요.


이 밖에도 정림사지는 금당의 이중기단, 강당지 및 회랑지의 와적기단, 석탑부의 판축기법등

고대 가람의 특별한 형식을 보여주어 백제 건축의 사료적 의의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부여천진전단군화상

 

 

 

 

정림사지 발굴기

 

지표조사를 하고, 시굴조사 그리고 발굴을 하고 정리분석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정림사지에서 발굴된 청자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기와들

 

 

 

 

기와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정림사지 초석

 

방형초석은 64.5X65.5cm 의 장방형에 가까운 초석면을 가공하였고

윤곽을 바로 잡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높이 3cm 한단 각출하였습니다.

석재의 두께는 26cm 입니다.

 

원형초석은 파손을 입어서 부정원형을 이루고 있으나

주위의 윤곽을 일단으로 각출한 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사용된 원형초석으로 짐작됩니다.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치미와 전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소조불

 

 

 

 

 

 

 

 

 

 

 

 

 

연꽃무늬 와당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아름다움의 요체는 체감률에 있다고 하지요.

석탑의 비례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백제불교문화관

백제의 불교수용과 그리고 일본으로의 전파에 관한 이야기들

 

 

 

 

정림사지로 가는 길

바닥에는 연꽃들 피어 있고, 석등들 불 밝힌 곳을 지나

 

 

 

 

정림사지로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석탑을 쌓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박물관을 돌아보는 일도 재미있습니다.

그밖의 다른 유물들을 보시거나 자세한 안내를 원하시면 클릭해 보세요

정림사지 박물관 http://www.jeongnimsaji.or.kr

 

 

정림사지 찾아가는 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정림사지길 36

천안 논산간 고속도로 정안 ic - 23번 국도- 공주- 백제 큰길- 부여- 정림사지

 

 

부여의 다른 곳을 아직 보지 못하셨다면 클릭해 보세요~

여름의 끝자락, 연꽃을 만나고 싶다면 여기로 가봐-부여 궁남지 http://blog.daum.net/sunny38/11776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