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도 여행(india)

1,500년을 견뎌낸 벽화가 주는 신비감에 빠지다-인도 아잔타 석굴-인도46

 

 

 

인도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문화, 자연, 복합 유산이

28곳이나 되는 세계 7위의 ‘유산 강국’이라고 합니다.

정부가 관리하는 고대 유적이나 기념비적 건축물도 3000곳이 넘는다고 하지요.

 

인류 문명과 주요 종교의 발상지여서 그런지

우스개 소리로 발길 닿는 곳이 유적이요, 발길에 차이는 것이 유물이라는 말까지 있는 나라입니다^^

 

그 많은 인도의 유산 중 세계유산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곳, 

그것도 그 유명하다는 타지마할과 함께...

바로 인도 중서부의 아잔타 석굴입니다. (2012년 2월 21일)

 

아잔타 석굴 사원은 와고레 강 협곡 절벽에

28개의 동굴이 자리하고 있으며

'인도 불교 예술의 보고'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아잔타 석굴 사원이 '인도 불교 예술의 보고'라고 불리우게 된 것은

불교의 초기 회화, 조각, 건축 등 훌륭한 예술적 가치가 응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아잔타 석굴의 회화 중

가장 유명한 연꽃을 들고 있는 보살 상입니다.

 

6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1번 굴에서 볼 수 있는 벽화로

1,500년의 세월을 견뎌낸 벽화가 주는 신비감에 저절로 빠지게 합니다.

 

1500년을 견뎌낸 벽화는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 이야기인 자타카(Jataka)를 주로 묘사했습니다.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아 색감은 다소 흐릿하지만 그럼에도 화려한 색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아잔타 석굴 내부는 조명 장치가 거의 되어있지 않습니다.

라이트 티켓을 따로 구입하였으나 빛이 좋질 않으니

카메라의 iso를 높게 올려 찍었음에도 흔들린 사진이 많습니다.

기록용으로 남겨두기 위해 올린 것이니 양해바랍니다^^

 

 

 

 

잘 알려진 세계문화유산 아잔타와 엘로라는 중부 석굴 집중 지역 끝자락에 있습니다.

아잔타는 불교 석굴 사원이라면,

엘로라는 불교, 힌두교, 자인교 석굴들이 사이좋게 나란히 모여 있는 곳입니다.

 

오늘은 먼저 아잔타 석굴 사원군을 소개하겠습니다.

엘로라는 다음번에 따로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해안에서 내륙 데칸고원으로 올라가는 西가트 산맥의 가파른 지형은

마치 우리 동해안에서 태백산맥 대관령으로 가는 길처럼 굽이굽이입니다.

 

현대 인도의 최대도시 뭄바이는 인근에 옛 항구 소파라가 있던 곳으로

인근 페르시아, 아라비아와는 물론 로마와도 교역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석굴 분포는 정확히 내륙으로의 물자 수송로와 일치한다고 하지요.

 

인도 중서부 뭄바이에서 내륙으로 약 480km 떨어진 마을 아잔타..

작은 시골 마을 아잔타는 아잔타 석굴 사원으로 1년 내내 여행객들로 분주한 곳이 되었습니다.

 

아잔타 석굴 사원으로의 여행,

여행자와 함께 떠나보실래요?

 

사진은 아잔타 석굴로 오르는 초입으로

나무들조차 잘 자라지 않는 건조한 지형이 석굴 내부의 벽화들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지 않았나하고 추측을 해봅니다.

 

 

 

 

 

아잔타 석굴 관람객은 하루 평균 1000명 이상,

아잔타 석굴 입구에서 차에서 내려 천연가스 버스로 갈아탑니다.

차량 매연이 석굴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유적 1.6km 이내에서는 천연가스버스만 운행하기 때문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200m쯤 걸어 언덕을 오릅니다.

 

 

 

 

돌들을 깎아 만든 계단..

 

 

 

 

입구의 매표소 또한 석굴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행자의 눈앞에 펼쳐진 아잔타 석굴 사원..

인드야드리 언덕에 벌집처럼 작은 구멍이 나 있는 석굴들은

수천 년동안 조용히 햇볕을 쬐며 말없이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지요.

 

이곳 아잔타 석굴 사원은 오랜 기간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곳입니다.

BC 2세기부터 7세기까지 만들어진 석굴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1819년 호랑이 사냥을 하던 영국군 병사 존 스미스 일행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왼편 맨 위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말발굽 모양의 골짜기를 따라 

1.5km에 걸쳐 석굴 사원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BC 2세기부터 7세기까지 순수하게 불교 예술을 꽃피운 아잔타는

생동감 넘치는 벽화, 인자한 부처의 모습, 고풍스런 스투파,

그리고 수행자의 명상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 석굴입니다.

 

불행하게도 석굴을 조성한 사람들이 누구이며,

언제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거대한 석굴을 지었는지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아잔타가 가진 신비감은

종교적 믿음을 초월해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듯 합니다.

 

 

 

 

아잔타 석굴 사원의 28개의 동굴 중 1번 굴입니다.

 

석굴은 1번부터 28번까지 번호로 불리우는데

편의상 붙인 것일 뿐 별다른 의미는 없다고 하지요.

조성 시기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반드시 둘러봐야 하는 석굴로는 1, 2, 4, 16, 17, 19, 26번을 꼽습니다.

그중에서 오늘은 1번 석굴과 2번 석굴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아잔타 28개의 석굴은 전기에 6개, 후기에 22개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불교 초기 히나야나(Hinayana) 시대에

현재의 9번과 10번(기도하는 곳) 및 8, 12, 13, 15번(수도하는 곳)이 건설됐다고 합니다.

 

이후 서기 5세기 중엽∼6세기 초 인도 중부의 제국 바카타카의 하리세나 왕 지휘 아래

두 번째 석굴이 추가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1번 굴은 6세기 경에 조성된 비하라 석굴입니다.

비하라 석굴은 기둥 없이 넓게 파도 무너지지 않는 독방군 거주굴을 말합니다.



 

 

사진들은 1번 굴 외관에 장식된 조각들입니다.

 

 

 

 

1번굴은 아잔타 석굴 사원군에서

최고의 벽화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연꽃을 들고 있는 보살이 이곳에 그려진 벽화이기 때문입니다.

 

 

 

 

신발을 입구에 벗고 석굴 안으로 들어갑니다.

석굴 사원의 바닥을 보호하기 위해 신발을 벗어야 한다고 합니다.

 

 

 

 

작은 채광창 위에도 조각이 새겨져 있습니다.

 

 

 

 

동굴 내부입니다.

 

천정과 벽과 기둥에 새겨진 프레스코화들..

1500년 전에 그려진 그림들이 아직도 이리 선명한 색깔을 보여준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기원전 1세기부터 만들어져 6세기까지 만들어진 석굴 사원들은

5세기 말 하리세나 왕이 갑자기 숨지고 힌두교에 밀린 불교가 쇠퇴하면서 아잔타 석굴은 잊혀졌습니다.

 

역설이지만 잊혀졌기 때문에 지금의 석굴과 벽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그러다 1819년 4월 인도 주둔 영국군 존 스미스 대위는

부대원들과 아잔타 마을 인근 숲에서 호랑이 사냥에 나섰습니다.

 

언뜻 비친 호랑이 자취를 쫓던 스미스 대위는 숲이 사라지고

앞쪽의 땅이 푹 꺼지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절벽 아래로는 와고레 강이 말발굽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고

강 저편에는 그 모양대로 높은 용암 절벽이 솟아 있었습니다.

절벽 중간쯤 검은 구멍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스미스 대위 일행이 강을 건너 절벽을 기어올라 들어간 동굴은 10번 석굴.

기원전 1세기경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석굴입니다.

그들 일행을 맞이한 건 박쥐 떼와 인간의 유골 및 동물의 뼈,

바닥에 수북이 쌓인 재와 낙엽이었다고 하지요.

 

곧 그들은 코끼리 양 등이 조각된 기둥과 벽화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더욱 놀란 건 바로 이 석굴이 자연 동굴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만든 작품이라는 점이었다고 합니다.

 

아잔타 석굴이 1,000여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1세기경 만들어진 첫번째 석굴군,

그리고 6세기경 만들어진 두번째 석굴군..

 

이 두 석굴군을 구별하는 방법은

석굴 사원 안에 불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됩니다.

 

전기 사원에는 불상이 없는 반면

후기의 것에서는 불상이나 부조로 된 조각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불상이 있는 사원은

후기 사원이라는 것이지요^^

 

불상을 중심으로 양쪽 벽에 아름다운 벽화들 보이시지요?

 

 

 

 

1번 석굴 안에 모셔진 불상

 

 

 

 

불상을 좀 더 가까이서 살펴봅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는데 그렇게 보이시나요?

 

 

 

 

연꽃을 들고 인자한 모습을 보이는 관세음보살을 표현한 벽화

보디사따바 빠드마빠니 Bodhisattava Padmapani (지연화 보살화) 로 불리우는 벽화입니다.

 

우리나라 여행자들이 이 불상 앞에서 발을 멈추는 이유는

일본 법륭사의 금당 벽화와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출가하기 전의 붓다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이 이어집니다.

 

 

 

 

1,000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홀로 고립된 채 잠들어 있었던 벽화들은

발견 당시에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했으나

발견 후 전문적이지 않은 보수 작업으로 인해

현재는 벽화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1번 석굴을 둘러보고 2번 석굴로 향합니다.

가다 돌아보니 1번 석굴이 절벽 아래 자리하고 있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번 석굴..

오후의 햇살이 제대로 비추이고 있어 내부의 벽화를 보호하기 위해

차양을 내려 놓았습니다.

 

 

 

 

2번 석굴도 6세기에 조성된 비하라 석굴로

부처의 전생과 이생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 때문에 유명한 곳입니다.

 

 

 

 

입구의 벽면에도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는 곳입니다.

 

 

 

 

벽 위쪽의 조각상

 

 

 

 

석굴로 들어가는 입구 위편의 조각상들

 

 

 

 

역시 입구 위편의 조각상

 

 

 

 

그리고 들어간 내부

천정과 벽면에 빼곡한 벽화들..

 

 

 

 

기둥에도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석굴의 유래는 석가모니 제자 출가자들이 함께 모여 수행하며

우기의 비를 피해 또 혹서기의 무더위를 피해 영구 시설인 석굴을 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산치 같은 평지 사원은 스투파를 가운데 모시고 그 주위 사방에 집단 거주처를 만들었지만,

바위 절벽에 죽 판 석굴은 일렬로 배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간쯤에 스투파 모신 예배굴, 즉 차이탸 굴을 하나 파고

좌우로 거주굴 즉, 비하라들을 여러 개 줄줄이 팠다고 합니다.

 

 

 

 

그러하니 1번이나 2번 굴처럼 끝자락에 위치한 굴들은

비하라인 것입니다.

 

 

 

 

1,000년도 전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들

여행자의 눈길을 붙들기에 충분합니다.

 

 

 

 

석굴이 집중 분포한 곳은 중부 데칸 고원 일대입니다.

화산 용암이 식으면서 수평으로 굳어져 현무암이 된 지형이라고 하지요.

 

시루떡처럼 층층 켜켜 띠로 굳어졌기 때문에 반듯이 일렬로 팔 수 있고,

또 기둥 없이 꽤 넓은 공간을 파내어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같은 현무암이라도 공기 구멍이 숭숭 있는 제주도 암석보다는 훨씬 단단하기 때문에

이런 석굴이 가능하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조각과 벽화들 앞에서 눈을 감습니다.

 

끌과 망치를 든 석공이 절벽위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면서

천정이 될 부분을 위에서 아래로 또 밖에서 안으로 쪼아갑니다.

 

무작정 빈 공간을 파내는 것이 아니라

기둥, 탑을 만들고 수도승 공간,침상을 만들 암반을 남깁니다.

 

정밀한 설계도 없이는 못하였겠지요?

 

 

 

 

벽면 부조까지 만들면 화공이 내려와 벽화를 그렸을테지요.

석굴주변에서 구할수 있는 고령토, 석회석, 대자석, 해녹석, 검댕, 청금석으로 6가지 색을 만들고

이를 혼합해 벽화를 그렸습니다.


불교문화가 융성할 때 최고 장인들의 손을 걸친 걸작은 이렇게 탄생하였을 것입니다.


 

 

 

기원전 3000년경 인도 아소카왕이 만들었다는 '바라바르 석굴'을 시작으로

석굴 사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지요. 

 

석굴사원은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한국 등으로 전파되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굴, 중국의 둔황 석굴 등은

우리 귀에도 익숙한 세계적인 석굴사원들입니다.

 

이 석굴사원들이 만들어지고 한국에서는 석굴암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인도나 중국의 바위는 파거나 다듬기가 쉽지만

우리나라의 바위는 뚫기가 매우 어려운 화강암 재질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의 석굴사원은 석굴암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라이트를 비춰주긴 하는데

빛의 차이가 심하니 사진이 더 좋질 않습니다.

 

 

 

 

 

 

 

 

 

 

 

 

천 개의 부처에 천 개의 표정이 담겨 있습니다.

‘같음이 아닌 다름’으로 표현한 천불도...

 

 

 

 

2번 굴 내부는 수많은 벽화들이 그려져 있는 곳입니다.

 

 

 

 

천정과 벽면의 수많은 벽화들

 

 

 

 

 

 

 

 

 

 

 

 

 

석굴은 금이 가고, 물이 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석굴을 다녀가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지요.

 

그래서 내부에서는 카메라 플래쉬를 터트릴 수 없습니다.

앞으로 50년 후면 이 석굴들을 볼 수 없을거라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으니

문화유산의 가장 강력한 적은 자연이라기보다는

인간인 듯 합니다.

 

 

 

 

2번 석굴 맨 안쪽에 위치한 조각상

 

 

 

 

천정과 벽면에 가득한 벽화에 둘러싸인 또 다른 조각상

 

 

 

 

석굴 두개를 둘러보고 나왔을 뿐인데

마치 다른 세상을 보고 온 듯 합니다.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긴 세월을 견뎌온 그림들이 주는 경이로움..

오래 기억될 것만 같은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