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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저수지-벽골제

 

아리랑 문학관 건너편에 벽골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벽골제는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저수지로 <삼국사기>에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벽골제를 축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330년은 이 지역이 백제 영토로 추정되므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오기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벽골제 축조시기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듯 합니다.

 단야루

 김제를 옛 마한 시대에는 벽비리국, 백제시대에는 벽골군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는 벼의 골이라는 뜻으로 도향의 이름입니다.

이러한 지명의 연유로 벽골제는 우리 고어로 벼골의 둑이 한자로써 벽골제라고 표기된 것은 이두표기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벽골제 내에 위치한 아리랑 문학비

이곳에서 지평선 축제도 열린다고 합니다.

 벽골제 내의공원

이곳에는 공원 뿐 아니라 벽골제 농경문화 박물관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벽골제 수문의 하나였던 장생거의 모습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벽골제는 한때 3.000만평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제천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더불어 3대 저수지였던 이곳은 5개의 수문 중 장생거와 경장거 두 곳의 수문 석주가 남아 있습니다.   

 

                                                 

 국내 최고최대의 저수지인 벽골제는 금만평야를 비롯하여 정읍시, 부안군 등 1만 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였습니다.

제방의 길이는 3.3km, 둑의 높이는 5.7m, 상단폭 10m, 하단폭 21m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벽골제는 4번에 걸쳐 개축하였으나 세종 2년 (1420년)에 홍수로 무너졌습니다.

그후 1925년 농업관개수로를 설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벽골제의 모형도

 두마리의 용

벽골제와 관련된 용추의 설화를 재현해 놓은 듯 합니다.

 대나무로 만들어 놓은 대형 조형물입니다.

 

 

 넓은 공원에 그네를 타는 아이들

 월촌 입석 

입석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재앙을 막아주는 수문신이자, 마을의 풍농과 평안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섬겨진 큰돌 문화재입니다.

입석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보름날 남녀 편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여자편이 이겨야 그해 풍년이 든다고 믿고 있습니다.

줄다리기가 여자편의 승리로 끝나면 사용한 동아줄을 입석에 감아두고 고을의 풍농과 안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린다고 합니다.

 입석에 감아둔 동아줄에 손을 대면 동티가 난다고 해서 다음 제사 때까지 1년 동안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입석은 사각기둥 자연석이며 높이 210cm, 폭 62cm, 두께 40cm 입니다.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매년 지평선 축제 때 이곳 벽골제에서 입석 줄다리기를 시연하고 있습니다.

 단야각

통일신라 제 38대 원성왕 때의 일입니다.

벽골제가 축조된 지 오래되어 나라에서는 토복기술자인 원덕랑을 급파합니다.

원덕랑이 벽골제에 도착하여 보수공사에 힘을 쏟는 동안, 지역 태수의 딸 단야는 원덕랑을 흠모하게 됩니다.

한편 큰 공사에서는 <용추에 제물을 바쳐야 공사가 순조롭다 >는 속신이 있었는데, 원덕랑이 이를 무시하고 공사를 진행하여 공사를 진행하여 백성들의 우려가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원덕랑의 약혼녀 월내가 김제 벽골제에 이르자, 태수는 딸 단야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하여 월내를 보쌈하여 제물로 바치고 보수공사도 마치려고 합니다.

아버지의 계책을 알아챈 단야는 자신을 희생하여 제방도 완성하고, 아버지의 살인을 막아내기위해, 스스로 용의 제물이 되었고, 벽공제는 무사히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근거에 벽골제에 단야각을 세워 영정을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단야각의 단야의 모습

 

초등학교 사회 시간에 배웠던 곳인데,

우연히 가보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