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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상남도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했던 곳-벽송사

 

 여행을 가기 전에 보통 가야할 곳에 대해 미리 인터넷을 찾아보고, 책을 찾아보곤 합니다.

벽송사를 포스팅하려고 자료들을 찾아보다보니, 이번에 벽송사를 갈 때 사전 지식이 없이 다녀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벽송사에서 꼭 봐야 할 것이 절집 뒤로 보이는 도인송과 미인송 그리고 삼층석탑을 봐야한다고 하네요. 셋다 제대로 보지 않고 왔다는...

벽송사 절집 풍경

 벽송사는 신라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며, 조선 중종 1520년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하였다고 합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곳이라고도 전해지는 곳입니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에서 보면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서산휴정, 부휴선수, 사명유정, 청매인오, 환성지안, 호암제정, 회암정혜, 경암응윤, 서룡상민 등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벽송사 안내문에 적힌 것을 옮겨 적어 봤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차분히 찾아봐야할 듯...) 

 벽송산문의 2대 조사가 부용영관선사인데 그의 문하에 가장 뛰어난 제자가 서산대사라 불리는 청허유정과 부휴선수였다고 합니다.

서산대사는 벽송사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벽송산문의 제 3대 조사가 되어 지리산 일대에서 행화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을 일으키기도 하신 분입니다.

벽송사는 중창된 후 불당, 법당 등 30여 동의 전각과 부속암자가 10여개가 넘기도 하였으나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게 방화되어 완전 소실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벽송사 선방에서 도인이 수 없이 많이 나서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고 하네요.

 벽송사 절집 마당에서 바라본 풍경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을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부용(연꽃)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 혹은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의 청학포란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온종일 성성히 앉았노라니 천지가 한 눈에 들어오네. 벗이 있어 초암으로 찾아오니 밝은 달 맑은 바람이어라 <환성선사- 벽송사 7대 조사>

-벽송사를 오르는 길, 곳곳에 적혀 있던 문구들을 옮겨봅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절인데, 최근에 다시 지어진 절이라, 조금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익도 구하지 않고 명예도 구하지 않으니 누더기 납자 마음 비어 무슨 망상 있으랴, 발우 하나로 살아온 인생 어디서나 만족하니 다만 이 한 맛으로 남은 생을 보내리 <나옹선사>

 벽송사 목장승(민속자료 제 2호)

목장승은 솟대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요.

벽송사 입구에 세워진 이 장승은 사찰에 들어오는 악귀의 퇴치, 사찰 경내에서 행해지는  불법어로와 사냥의 금지, 풍수지리상의 비보(풍수지리상에서 나쁜 기운이 깃든 산천 등에 탑, 장승 등을 세워 나쁜 기운을 억누르고 약한 기운을 도와 보충하는 것) 역할 등 다양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제작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략 일제시대 초기에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목장승은 노천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기때문에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곳 왼쪽에 서 있는 금호장군 역시 커다란 왕방울 눈만 빼고 상당부분 제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른쪽 장승인 호법대신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서 있습니다. 머리와 큰 눈, 큰 코, 일자형 입과 수염 등이 매우 인상적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무서운 것 같으면서도 순박하고, 위풍당당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모습이라서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합니다.

이 두 장승은 불교와 민간신앙이 어우러져 나타난 걸작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벽송사를 내려오는 길.. 곳곳에 걸려 있는 글귀들이 마음을 붙듭니다.

 

 벽송사 입구의 목장승

경내에 있던 목장승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무심은 수월(물에 비친 달)과 같고, 지절은 한송(추운 겨울 소나무)과 같다. 지절의 한송과 무심의 수월은 예로부터 서로 어우러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