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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상남도

남도 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고택-일두 정여창 고택

 

 2009년 2월 7일에 다녀온 함양 여행 사진을 마저 올려봅니다.

조선시대 오현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일두 정여창선생의 고택을 찾아 갑니다.

고즈넉하고 정갈한 품위가 넘치는 남도지방의 대표적인 전통 가옥입니다(중요 민속 자료 제 186호)

이제 고택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정여창 고택의 솟을 대문의 모습입니다.

골목은 좌우로 다 통하게 하면서도 입구에서는 막다른 골목으로 보이게 만든 것은 낮 선 길손이 집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대문간에 충효의 가문임을 나타내는 홍살문이 있으며 윗편으로 5개의 충효정려가 있습니다.  

 사랑채에 앉아 있으면서도 대문밖에 사람들이 오고 가는 사항을 알 수 있도록 골목을 박석으로 깔았다고 합니다.

솟을 대문 위에 걸려있는 5개의 충신, 효자 정려패- 조선시대 사회제도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중요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맨 위의 정려는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할아버지이며 나머지는 후대손들이라고 합니다.

 이집은 정여창 선생(1450-1504년)이 타계한지 1세기 후에(1570년대) 후소들에 의하여 증건되었고, 3000여평의 대지가 잘 구획된 12동(당초 17동)의 건물이 배치된 곳입니다.

넓은 집터에 솟을 대문, 행랑채, 사랑채, 안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아래채, 광채, 사당 등 여러채의 건물이 서 있어 양반대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곳입니다.

이 집은 구조적 특성을 보일 뿐 아니라 세간, 살림살이들이 비교적 옛스러운 대로 제자리에 보존 되고 있어서 당시의 생활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랑채의 모습입니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 글씨

사랑채를 이루고 있는 마루와 기둥의 나무를 보면, 세월이 느껴집니다.

 사랑채의 마루

 

 사랑채를 지나 이제 중문간채로 갑니다.

중문 문지방의 가운데를 낮게 만들어 치마를 입은 부녀자들이 다니기 쉽게 만들었으며 문간방에는 안채에 딸린 하인들이 거주하였습니다

 중문간채

문간방을 겸하면서 좌우의 벽이 막힌 통로 형식으로 만들어 졌으며 안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 곳을 통하여 속세로 출입을 한다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즉 안 사람들을 거치른 바깥 세상의 물정에 물 들지 않고 순박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안곳간채

안채에서 쓰이던 재물이나 소용품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필요할 때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 미리미리 마련하여 두는 것이 요긴하여서 잘사는 집에서는 여러가지 곳간이 필요하였습니다.

 이 곳간의 가운데 곳간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귀중품을 보관하는 세간살이를 오른쪽은 식료품 및 그에 따른 살림살이를 보관하여 왔습니다.

예전에는 많은 세간살이들이 있어 옛 생활사의 좋은 자료가 되었으나 많은 도난을 당하였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안채의모습

가운데 우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채에 위치한 부엌

 안채의 넓은 대청마루

 안채의 규모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굴뚝의 모습

굴뚝에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안채를 지나니 다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사랑채나 아래채가 아닐까 싶습니다.

 왼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장독대가 있는 안채의 뒤뜰이며, 오른 편은 사당을 들어가는 문인데, 이곳은 잠겨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광의 모습도 보입니다.

 이곳이 안사랑채일 듯 싶습니다. 설명이 없으니.. 알기가 어렵네요.

 바깥의 채소밭으로 나가는 작은 문

 

수백년 된 전통한옥이 잘 보전 되어 있어

한옥 박물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곳인 듯 합니다.

개평 마을에는 100여채의 한옥이 잘 보존 되어 있다고 하는데,

몇 군데만 둘러보고 나옵니다.

함양의 다음 여행지는 어디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