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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기권

정조의 효심이 깃든 융릉..그리고 건릉

 

 2008년 9월 26일, 1주일 내내 흐린 날이더니, 모처럼 푸른 하늘을 보여줍니다. 대충 일을 마무리하고 오후에 화성 융,건릉으로 향합니다.

가까운 곳에 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곳을 가을 날 오후의 산책 장소로 정합니다. 

 수원시 교외 약 8km쯤에 자리잡은 융,건릉(隆健陵 사적 206호)은 부친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를 모신 융릉(隆陵)과 정조대왕과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건릉(健陵)을 말합니다. 융릉은 화산의 서남쪽, 건릉은 서북쪽 기슭에 들어 있어 모두 서향입니다.

융,건릉 입구를 지키고 있는 140년 된 향나무, 향나무는 나무 속살에서 강한 향기가 나서 향나무라고 한다는군요. 향을 피우는 것은 부정을 없애고, 정신을 맑게 하여 천지신명과 연결하는 통로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신을 불러오는 매개체로 제사를 드릴 때 반드시 향을 피우며 여러 종교 의식에서도 쓰인다고 합니다.

속살이 붉은 빛을 띤 보라색으로 흔히 자단으로 불리운다고 합니다.

입구에 향나무를 심어 놓은 것에도 깊은 뜻이 숨어 있는 듯 합니다.

                                         

융, 건릉을 들어서니, 오후의 산책을 나오신 분이 여기도 계시네요.

                                         

오후의 햇살이 기울기 시작하는 시각. 나무들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이곳의 해질녘의 분위기는 그윽하고 깊은 느낌을 안겨 줍니다.  하늘을 가린 짙은 송림과 상수리 나무숲이 이루어져 있어 숲길 산책으로 권할 만 한 곳입니다. 능을 다 돌아보는 데는 숲속 오솔길로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융릉

융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1735-1762)와 그의 비인 헌경왕후(獻敬王后) (1735-1815) 홍씨가 묻힌 곳이다. 1749년(영조 25년)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하면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의해 영조의 미움을 사 영조 38년 (1762)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그후 영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고, 묘호를 수은묘라 하였다.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 (광무 3년)에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장조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 배봉산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아래에 있었는데 정조가 수원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이라고 하였고, 장조로 추존된 뒤 능호를 융릉으로 높였다. 헌경왕후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로 1744년(영조 20년)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장조가 세상을 떠난 뒤 혜빈 정조 즉위년에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고, 뒤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헌경황후에 추존되었다.

왼편에 보이는 곳이 수랏간, 가운데는 정자각, 오른 편의 건물은 신도비각이라고 하네요.

  융릉의 홍살문, 홍문이라고도 불리우는 문이지요.

 

 

 융릉의 정자각- 이곳은 정丁자 모양을 한 건물로, 제향을 지내는 곳이라고 합니다.

 

 정자각과 뒤로 보이는 융릉- 신도와 어도를 구분하여 넓게 박석을 깔아 놓은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갑니다.

 

웅릉은 합장릉으로 동,서, 북 3면에 곡장을 두르고, 봉분은 모란과 연화문을 새긴 병풍석을 둘렀는데 난간석은 생략되었다. 그러나 방위 표시를 위해, 병풍석 위에 꽃 봉오리 모양의 인석에 문자를 새겨 넣었다. 봉분 바깥으로 석호와 석양을 각각 2기씩 배치하여 봉분을 호위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 망주석과 장명등,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들을 배치하였는데, 추존 왕릉임에도 무인석까지 배치한 점이 중요하다. 또한 제향을 지내는 정자모양을 한 정자각, 정자각 뒤로 제향 후 축문을 태워 묻는 사각형의 석함인 예감, 비를 인치하는 비각, 제물을 준비하는 수라간, 제향후 축문을 태워 바라보는 곳인 망료위 등의 부속 시설이 있다. 신문, 정자각까지는 두 사람이 걸을 수있는 폭의 신도와 어도로 구분하였고, 정자각 그 아랫단 왼편까지 넓게 박석을 깔았다. 융릉은 누가 보아도 능 조영에 정성을 들인 정조의 효심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정자각 지붕 위의 잡상 - 액을 막기 위해 해놓은 것이지요.

 융릉을 둘러싸고 있는 곡장, 석호, 장명등이 멀리 보입니다.  

 융릉을 지키고 있는 잠자리- 잠자리들의 비행은 가을을 더욱 느끼게 해줍니다.

 

 융릉을 돌아 나와 이제 건릉으로 향해 가야 할 때입니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곤신지

융릉 앞쪽에 있는 연못으로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인 1790년 조성되었으며 곤신방(남서방향)은 융릉의 생방(풍수지리 용어로 묘지에서 처음 보이는 물을 지칭)으로 이곳이 좋은 곳이기때문에 판 연못이라고 합니다.

 곤신지 속의 세상

제가 좋아하는 반영을 찍어 뒤집어 보기 ㅋ

세상과 반영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너와 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

 여름 날은 연꽃이 피어 또 다른 느낌을 줬을 듯 합니다.

                                          

 

 곤신지 앞의 보라빛 열매- 사진을 찍으면서 식물들의 이름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이 보라빛 열매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식물 도감도 사게되고..

그러나 식물도감에도 나오지 않은 꽃과 열매는 또 얼마나 많은지.. 자연의 무한함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숲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건릉으로 향합니다. 숲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건릉입니다.

 

건릉은 정조(1776-1800 : 재위, 1752-1800)와 효의왕후(1753-1821) 김씨가 묻힌 곳이다. 정조는 장조의 아들로 1759년 (영조 35년)에 세손에 책봉되었다.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영조의 맏아들 효장 세자(추존)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영조 51년) 연로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였고, 영조가 승하하자 1776년에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아버지인 장헌 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영조 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왕실의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여 새로운 혁신정치를 펼쳤다. 또한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로운 활자를 만들었으며, [속오례의][국조보감][대전화통] [증보동국문헌비고] 등의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였다. 재위기간은 정조의 학문적 소양에 터전한 적극적인 문화 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중국의 건륭 문화의 영향 등으로 문화적인 황금시대를 이루어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를 이루었다.  

건릉은 합장릉으로 동,서,북 삼면의 곡장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다른 상설내용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석물은 난간석 바깥으로 석호와 석양을 각각 4기씩 배치하여 봉분을 호위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 망주석과 장명등,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들을 배치 하였다.

 

 조선 제 22대 왕 정조는 효심이 각별했던 임금이라고 하지요.

왕위에 있는 동안 보여준 지극한 효심은 백성에게까지 추앙을 받았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는 비명에 숨져간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옮겨 묘호를 바로 세우는 등 선친의 원혼을 위로하는 한편 1년에도 수차례 능 참배길에 나섰고 가식없는 효심으로 백성을 감복시켰다고 합니다.

 

 가을날 오후

자전거는 떠날 이를 그리워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나뭇잎은 살랑 흔들려보는

한가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