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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기권

독립문과 독립공원

 

 인왕산에서 내려와 독립공원을 갑니다. 그런데 독립공원도 재정비 중이랍니다. 사방에 철빔이 설치되고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은 문을 닫았습니다. ㅠㅠ

독립문입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다. 사적 제32호. 높이 14.28m, 너비 11.48m.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의 정문인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1896년(건양 1)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독립협회 발의로 고종의 동의를 얻어 3,825원을 모금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다.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했으며, 당시 서양건축의 조영경험이 있던 목수 심의석(沈宜碩)이 공사감독을 맡아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만들었다. 설계자가 당시 우리나라에서 많은 건물을 설계한 러시아인 사바틴이라는 설도 있다. 

 45×30㎝ 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이 문은 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내부 왼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렀다. 이맛돌 위에 앞뒤로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고 그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지만 쌓는 방법은 우리나라 전통기법을 사용했다. 무지개문 좌우의 받침기둥, 모서리의 귓돌, 꼭대기의 난간만이 서양식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출처- 다음 백과

 

독립문은  지금 이자리에서 동남측 70미터 지점에 있던 것을 성산대로 건설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독립 공원 내의 독립관

독립관은 원래 1407년(태종 7년)에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지어진 영빈관으로서 초기의 이름은 모화루였으나 1429년 확장 개축되며서 모화관이라 개칭되었다고 합니다. 세워질 당시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350m 떨어진 영천동이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 지붕 구조로 되어 있는 조선시대 한식 목조 건축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이라고 합니다.

한말에 이르자 국제관계의 변화로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던 모화관을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세우면서 독립관이라 개칭하고, 애국토론회를 개최하여 자구, 민권, 자강사상을 고취시키는 독립운동의 기지로써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독립운동 탄압의 일환으로 이 건물을 철거해 버렸다고 합니다.

서울시는 1989년 독립공원 조성계획에 의해 독립관을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지상 1층에는 국권회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신 순국선열의 위패 3000 여 위를 봉안하여 고혼을 위령하는 추모의 장이 되게 하였다고 합니다.

 3.1 독립 선언 기념탑

탑의 높이는 4.2m 이며 탑 뒤에는 3.1독립선언문과 손병희 등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판각되어 있다고 합니다.

원래 탑골 공원에 건립되었다가 1979년 철거되었다가 1992년 이곳에 옮겨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순국선열 추념탑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대한제국 말기에 일제의 강압으로 악명 높은 감옥이 지어져 80여년 동안 우리 근 현대사의 고난과 아픔을 간직해 온 역사의 현장입니다.

일제는 1907년부터 감옥을 짓기 시작하여 1908년 10월 21일에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후 일제는 애국지사들을 체포, 투옥하기 위해 마포구 공덕동에 새로운 감옥을 지었으며, 이 때문에 1912년 9월에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합니다. 1923년에 서대문 형무소로 다시 바뀌었으며 그 뒤 몇 차례 이름이 바뀌어 19876년 서울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가게 되자 1992년 광복절을 맞아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옥사 7개동만을 원형대로 보존하였고 그중 옥사 3개동과 사형장은 사적 제 324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서대문 형무소의 담장과 망루

 

길을 따라 걸으며 오래된 일들을 떠올려보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