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라남도

숲을 가르는 바람과 차 향기를 맡으며 오르는 길-다산초당/강진 여행

 

 

 

천리 밖 두 마음 옥인 듯 맑고 찬데

애처로운 사연 보니 그리운 맘 더욱 깊소

나 그리는 그대 생각에 잠이 들고 잠이 깨고

그대 그리워하다 보니 해는 뜨고 해는 지고.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생활 7년째에 아내가 혼인할 때 입은

활옷 치마폭에 써보낸 시에 대한 답시라고 합니다.

 

강진에서 유배생활 18년..

흔히 사람들은 정약용 선생이 이리 긴 유배생활이 있었기에

수많은 저서들을 집필 할 수 있었다고도 하지요.

 

하지만 이 시에서 보듯이 그도 양수리 소내에 남겨놓은 가족들,

아내 생각에 잠이 들고 잠이 깨고..

그리워하다 보니 해가 뜨고 해는 지고..

인간으로서의 고뇌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

수많은 나무의 뿌리들이 구불구불 얽혀 있는 길입니다.

정호승님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도 하였지요.

 

뿌리의 길을 따라 오르는 다산초당,

숲을 가르는 바람과 차 향기를 맡으며 오르는 길입니다. (2013년 2월 17일)

 

 

 

 

다산초당을 오르는 길은 다산 유물전시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다산유물전시관에서 정약용 선생에 대한 공부를 미리하고 가는 길입니다.

남인 학통..

남인의 시작은 퇴계 이황선생이시로군요.

 

노론세상에서 1795년 남인으로서는 오랜만에 채제공이 좌의정에 올랐고

이가환 선생은 공조판서가 정약용 선생은 동부승지가 되었지요.

 

남인들의 정계진출이 못마땅했던 반대세력들은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남인들을 사학에 물든자들이라고 하여

상소와 탄핵을 반복하다

결국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약종(정약용 선생의 셋째형), 황사영(정약용 선생의 조카사위),

이승훈(정약용 선생의 매부-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 은 처형되고

정약전(흑산도 유배), 정약용(강진 유배)은 유배 길에 오르게 됩니다.

 

 

 

 

학문적 이상을 정치개혁과 사회변혁을 통해 이루고자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꿈들..

 

그러나 그가 관직에 있을 당시에 만들었던 거중기..

 

 

 

 

수원화성을 짓는데 거중기를 이용하였다고 하지요

 

 

 

 

젊은 시절, 새로운 학문인 서학을 만나고

수학과 천문학, 건축학, 지리학까지 망라하여 다양한 학문을 접했던 정약용 선생은

다양한 방면에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적 유산을 남겨 놓았습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다산유물전시관의 유물들을 꼼꼼하게 살펴보시는 이생진 선생님이십니다.

 

 

 

 

다산 사상의 요체는 개혁이라고 합니다.

그가 남긴 600여권의 저서들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고 하지요

 

 

 

 

경제는 물론이고

 

 

 

 

의학

 

 

 

 

국방까지 다양한 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정약용 선생

 

 

 

 

스무 살 무렵에

이 우주의 모든 일을 다 깨닫고 그 이치를 완전히 정리해 내리라 마음먹었다던 그는

날개가 꺾어 강진으로 유배되어 왔지요.

 

다산유물관 뒤편, 다산의 동상이 희미한 산그림자 아래 서 있습니다.

 

 

 

 

그리고 다산유물관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오릅니다.

아주 오래전에 다녀온 다산초당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오릅니다.

 

전에 없었던 다산 유물관이 생겼길래

다산초당도 많이 바뀌었을까 좀 걱정이 되었는데

유물관을 지나 초당으로 오르는 길,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난 길..

다행스런 마음이 듭니다.

 

 

 

 

아버님,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어머님,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집안이 갑자기 무너져버려

죽은 자식 산 자식 이 꼴이 되었어요.

남은 목숨 이어가 봐도

크게 이루기는 이미 틀렸답니다.

자식 낳고 부모님은 기뻐하시며

부지런히 어루만져 길러주셨지요.

하늘 같은 그 은혜 꼭 갚으려 했는데

이리 풀 베듯 베일 줄 생각이나 했을까요

세상 사람들에게 다시는

자식 낳았다 축하 말라 해야겠네요

 

-하담의 이별, 정약용, 1801년-

 

하담에서 이런 시 하나 남겨놓고 유배길에 오른 정약용 선생..

그리고 18년의 세월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지요.

 

 

 

 

귤동마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오릅니다.

 

 

 

 

초당으로 오르는 길 양쪽에는 빽빽한 차나무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귤동의 뒷산에 차나무밭이 많아서 정약용 선생의 호를 다산(茶山)이라고 하였다지요.

 

 

 

 

뿌리의 길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 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중략-

 

정호승님의 뿌리의 길-

 

 

 

 

뿌리를 밟지 않고서는 오르기 힘든 뿌리의 길을 지나

숲 사이로 난 돌계단을 오릅니다.

 

숲을 가르는 바람이 살랑 불어오고

어디선가 차 향기가 나는 것만 같은 길입니다.

 

 

 

 

그리고 만난 다산초당입니다,

다산이 1808년 봄부터 1818년 가을까지 지낸 거처입니다.

 

 

 

 

초당을 지나 조금 더 위로 오릅니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이란 바위를 보기 위함이지요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 1경이라고 합니다.

 

 

 

 

정석 바위를 보고 다시 아래로 내려와 다산초당을 바라봅니다.

이곳에 거처하기 전까지 7년간 강진의 주막과 암자, 제자의 집을 전전하였다고 하지요

 

해남 윤 씨 집안의 정자였던 이곳은

다산의 학문적 연구를 집대성하고 제자를 키우는 곳이 되었었지요.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다산초당 현판

 

 

 

 

다산초당에는 정약용 선생의 초상화가 세워져 있습니다.

안경을 쓴, 온화한 선비의 모습입니다.

 

 

 

 

툇마루를 통해 바라본 풍경은

바람을 품고 있는 풍경입니다.

 

붉은 동백꽃 피어 주면 좋으련만..

시기가 좀 일러 꽃은 보지 못하였지요.

 

 

 

 

초당 앞에서 바라보니 차를 다렸다는 넓적한 바위와 서암이 보입니다.

 

 

 

 

서암벽에는 초의선사가 그렸다는 다산초당도 복제품이 걸려 눈길을 끕니다.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연지석가산이라 이름붙여 놓았습니다.

이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이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하게 여겼다고 하지요.

 

 

 

 

초당을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가봅니다.

독특한 모양의 나무가 눈길을 끕니다.

 

 

 

 

그리고 동암

송풍루라고 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려 집필에 몰두하였으며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고 합니다.

 

보정산방이란 이 현판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라고 합니다.

 

 

 

 

동암 뒤에 자리한 굴뚝도 담아 봅니다.

 

다산초당은 초당 양쪽에 동암과 서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암은 다산의 거처였으며 서암은 제자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초당 본채는 그대로 강의실 겸 도서관 겸 책을 만드는 편집실이 되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동암을 지나 백련사쪽으로 더 오르면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에서 따온 천일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일각을 지나 백련사로 가는 길이 이어집니다.

이길 또한 뿌리의 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길이로군요.

 

 

 

 

백련사까지 800m

다산의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해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고 하지요

야생차 군락과 동백숲이 우거진 길입니다.

 

 

 

 

독특하게 생긴 나무들,

이 길 위에서 여러가지 형태를 한 나무들을 만났습니다.

 

다산이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너희가 부지런히 글을 읽지 않으면 나의 책을 후세에 전해주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며

그렇다면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감옥에서 문초한 기록과 사헌부의 판결문만 믿고서 나를 평가할 것이 아니냐?'

라는 말로 자식들에게 책을 읽고 사색을 하라고 했다던 다산..

 

그의 곧은 성품을 보다못한 나무가 이리 구부러져 버린 것일까요?

 

 

 

 

백련사가 보일 즈음, 또 다른 정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발 아래 구강포 앞바다가 펼쳐지는 곳입니다.

바다라 하더라도 강진만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기에

폭이 그리 넓지 않은, 마치 강과 같은 풍경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 오고, 흐린 날 시야가 그리 좋지는 않지만

다산은 이곳에 올라 멀리 흑산도에 가신 형님을 그리워하고

강풍경 같은 이곳에 서서 소내 고향집을 그리워하기도 하였다지요.

 

1936년 다산 서거 백주년을 맞아 <여유당전서>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책은 154권 76책이라고 합니다.

시문집 25권 12책, 경집 48권 24책, 예집 24권 12책, 악집 4권 2책, 정법집 39권 19책, 지리집 8권 4책, 의학집 6권 3책...

방대한 양의 다산의 책들..

그의 18년 세월을 미뤄 짐작해봅니다.

 

이곳에 인용한 시구와 정약용 선생의 말씀 대부분은

안소영님의 지은 '다산의 아버님께'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여행자가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이지요

 

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린 적이 있는 책입니다.

다산의 아버님께에 관한 글 보러가기~

http://blog.daum.net/sunny38/11775750

 

다산초당 찾아가는 길

순천-목포간 고속도로 장흥ic- 장흥 오거리에서 강진방면-호산교차로에서 백련사 방변으로 좌회전-다산초당 이정표-다산유물전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