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라남도

윤선도의 오우가를 읽으며 돌아보는 해남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둥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빛이 맑다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많도다

맑고도 그칠 때가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둣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음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이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에 뿌리 곧은 줄을 글로 하여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

 

 

녹우당을 둘러보았다면,

고산 윤선도를 이해하기 위해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을 둘러보아야 합니다.

 

고산은 학문에 능한 것뿐 아니라 의학, 음양, 지리에 모두 능했다고 하지요.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를 소리내어 읽어보며

한바퀴 돌아보는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입니다. (2012년 4월 27일)

 

밖에서는 단층 한옥건물처럼 보이는 전시관은

내부로 들어가면 3분의 1은 지상으로 올리고 나머지는 지하공간을 파 조성한 독특한 형태입니다.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은 해남 백련동에 터를 잡고 살아온

해남윤시 어초은공파의 역사와 유물이 전시된 공간입니다.

 

유물전시관은 상설전시관과 특별전시관으로 되어 있으며

1층으로 들어서니 공재 윤두서의 특별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노승도, 조어도, 적표마도 등..

그의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들이 이어집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국보 240호라고 하지요.

여행자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자화상 뿐인데

그는 많은 그림들을 남겨놓았습니다.

 

 

 

 

그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그의 전시실에서 다시 하기로하고

일단 아래로 내려갑니다.

 

 

 

 

아래로 내려가니 독특한 그림이 그려진 엘리베이터에 눈길이 갑니다.

 

윤선도 유물전시관을 본격적으로 둘러보기에 앞서

600년을 이어온 남도의 종가 해남 윤씨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듯 합니다.

 

시조 윤존부는 고려 문종(1046-1083)때의 인물이고

그 후손인 녹우당 가문은 12대 효정에 이르러 강진을 떠나

해남에 터를 잡고 이후 지금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12대 윤효정 이후로 윤구 윤복 윤홍중 윤의종 윤유기 윤선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해남 윤씨가는 명문가로써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공재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입니다.

 

 

 

 

1전시실부터 차례로 둘러봅니다.

이곳은 해남 윤씨가에 관한 전시물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해남윤씨 족보목판입니다.

 

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이 중심이 되어

강진 덕정동 추원당을 건립하면서 문중의 결속과 친족 유대를 도모하기 위해 만든 목판입니다.

자손을 남녀의 구분없이 출생순서대로 기입하고 있으며

외손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목판은 1702년 고산선생의 손자인 심단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해남윤씨 족보

 

1702년 제작된 해남윤씨 족보목판을 기본으로 하여

인쇄한 해남윤씨가의 족보입니다.

 

 

 

 

해남으로 이주하기 전에 살던 강진의 한천동과 덕정동에 관한 소개글과

현재 녹우당이 자리한 해남 백련동 연동마을에 관한 소개글..

 

 

 

 

윤효정 교지

 

 

 

 

윤선도 교지

 

홍문관 대제학에 임명한다는 그런 내용인 듯 합니다.

 

 

 

 

옥문을 세번 열었다는 윤효정,

근검과 적선의 삶을 가르쳤다는 윤선도

백성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다는 윤두서에 관한 일화들

 

 

 

 

녹우당의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해놓았습니다.

 

 

 

 

전시실은 이제 녹우당에 관한 전시물로 이어집니다.

 

 

 

 

푸른 비로 사람의 마음을 흠뻑 적셔 주는 곳이라..

 

이름을 짓는 우리 선조들의 높은 안목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듯 합니다^^

 

 

 

 

공재 윤두서 분재기

 

공재 윤두서가 자손들에게 재산을 분배한 내용을 기록한 재산상속 문서입니다.

이를 통해 18세기 후반 해남윤씨가의 재산 상황과 재산분배에 관한 원칙을 알 수 있습니다.

 

문서의 작성은 1760년 당시에 이루졌지만,

실제 분재의 시기는 이보다 40년 전인 1720년

즉 윤두서가 죽은 지 5년 후 아들 윤덕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녹우당 현판

 

공재 윤두서 선생과 절친한 사이였던

옥동 이서의 글씨입니다.

 

 

 

 

앞개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강촌의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중 봄노래-

 

 

 

 

녹우당 사람들

 

12대 윤효정을 시작으로 21대 윤용에 이르기까지..

 

 

 

 

상아홀

 

1품에서 4품까지의 관리가 임금을 뵐 때 조복에 갖춰 쥐던 것으로

상아로 만들었습니다.

 

고산 선생의 조부인 낙천 윤의중이 명나라 연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선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백동경

 

해남윤씨가에서 대대로 사용하던 거울로

공재 윤두서 선생이 자화상을 그리는데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인장

 

전각에 조예가 깊었던 공재 윤두서를 비롯한 후손들이

사용하였던 여러 가지 모양의 도장

 

 

 

 

나침반

 

고산 선생이 경기도 여주에 있는 효종의 왕릉인

영릉의 자리를 정할 때 사용하였던 나침반

 

 

 

 

종가의 음식

 

녹우당 뒤의 비자나무 숲의 비자 열매는 해남윤씨 종부의 손에 의해

강정으로 만들진다는...  비자 강정

 

가을철 익지 않은 감을 따 가마솥에 푹 고아 거른 뒤

식힌 후 갖가지 고물을 묻힌다는 감단자..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종가의 음식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종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음식들에 이어

종부의 삶을 담은 규한록

 

 

 

 

규한록

 

광주이씨부인이 1834년(순조34) 3월 4일 보성군 대곡(한실) 친정에 가 있으면서

해남 시어머니께 올린 한글 궁체로 쓴 수기체의 글

 

고산선생의 8대 종부인 광주이씨(1804-1863년)는 17세에 결혼하였으나

신행 전에 홀로되어 남편 없는 종가 시댁의 종부로서의 집안의 중흥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규한록에는 광주이씨 부인의 고단한 시집살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길이 13m에 200자 원고지 150매 분량입니다.

 

 

 

 

규방가사

 

부녀자들의 생활을 담아 전해 온 안방문학

 

 

 

 

전시실은 또 다른 전시실로 이어지고..

 

 

 

 

고산 윤선도 선생에 관한 전시물들

 

시조문학의 대가~

1587년에 태어나 26세에 진사시에 합격

42세 봄 별시문과의 초시에 장원급제

42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고

50세에 병자호란

51세에 보길도 입도

52세에 경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 53세에 귀양풀리고

65세에 완도 보길도 부용동에서 어부사시사 40수를 지었으며

66세에 예조참의

74세에 함경도 삼수로 귀양갔다 81세에 귀양 풀리고

1671년 6월 11일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85세로 생을 마침

 

용모가 단정하고 안색이 엄숙하고 굳세어 대하는 사람이

바로볼 수가 없고 쏘아보는 눈빛이 섬연하다

-고산선생년보 중에서-

 

 

 

 

고산장원급제 시권

 

1633(인조 11년) 고산선생이 47세 때

중광항해별시에서 장원급제한 답안지입니다.

 

시작부분은 4대까지의 집안 내력이 쓰여 있으며
이것은 시험을 치르는 사람이 이 시험을 치를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일종의 자격기준입니다.

 

수험생은 이것이 붙여진 채 시험을 치르고

채점관은 채점의 공정성을 위해서 떼어내고 채점합니다.

 

위의 것은 47세 때의 답안지이고

아래 것은 42세 때 별시문과에서 장원급제한 답안지입니다.

 

 

 

 

궂은 비 멈춰 가고 시냇물이 맑아온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낚싯대를 둘러 메니 깊은 흥이 절로 난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산수의 경개를 그 누가 그려 낸고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중 여름노래-

 

 

 

 

은사첩(보물 482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였던 고산 선생에게

궁중에서 많은 선물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때 받은 하사품의 목록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산중신곡

 

보물 482호로

고산 선생이 65세에 지은 친필가첩

여기에는 그의 시가문학 중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진

오우가 등 시조 19수가 실려있습니다.

 

 

 

 

고산 선생과 원림~

 

오래전에 다녀온 보길도의 부용동이 여행자를 부릅니다.

 

 

 

 

고산 윤선도 교지

 

 

 

 

고산유고목판

 

고산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원본의 유실에 대비하여

정조가 1795년 전라감사 서유린에게 명하여 문집을 새긴 목판

 

고산유고의 목판 266매, 고산유사의 목판 7매

고산선생연보 30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산유고집

 

고산선생의 문집으로 유고 6권과 부록인 연보 및 유사 3권 등 모두 9권으로 편간된 것입니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시와 경 그리고 흥의 노래라 불리우는 어부사시사입니다.

 

물외에 좋은 일이 어부생애 아니던가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어옹을 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라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사철 흥취 한가지나 가을 강이 제일 좋아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중 가을노래-

 

 

 

 

그리고 전시실은 공재 윤두서 선생으로 이어집니다.

 

공재 윤두서는 자는 이산, 호는 공재입니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며 그림을 잘 그려 세칭 삼재(공재, 겸재, 현재) 중 한명입니다.

조선 중기말에서 후기에 걸쳐 활약하였고

화풍 역시 중기의 절파계의 화풍과 후기의 화풍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씨화보> <당시화보>를 기본으로 하여 스스로 습득, 발전시켜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후기에 유행하게 되는 풍속화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대표작으로는 <윤두서 자화상>이 있습니다.

 

 

 

 

가슴에 품은 큰 뜻, 고독한 자화상

 

윤두서 자화상을 소개하는 글이더군요.

이 작풍믄 국보 240호로

크기는 가로 20.5cm, 세로는 38.5cm 입니다.

종이에 엷게 채색하여 그린 이 그림은 화폭 전체에 얼굴만 그려지고

몸은 생략된 형태로 시선을 정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위 부분을 생략한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과 대결하듯 앞면을 보고 있으며

두툼한 입술에 수염은 터럭 한올한올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초상화 가운데 윤두서의 자화상은

최고의 묘사 기량을 보이며 자화상에 구사된 입체화법은 그 이후 초상화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옥이 흙에 묻혀 길가에 바렸으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구나

무어라 말이 있을지니 흙인 뜻이 있거라

 

-윤두서의 숨은 뜻-

 

 

 

 

윤두서의 그림들이 이어 소개되어집니다.

 

채애도(보물 481호)-나물 캐는 두 여인

 

윤두서의 대표적 풍속화의 하나로 대각선으로 배치된 산의 경사진 언덕위에서

두 여인이 나물을 캐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윤두서는 실용적인 박학을 추구하고 천문학 지리학 기하학 산술 등

서양에서 유래된 학문에도 심취할 만큼 진취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현실적인 생활을 담은 풍속화를 그리는데 앞장섰습니다,

 

당시 선비화가로서 이 그림과 같이 치마를 걷어 부치고

팔을 드러낸 여인네들을 그림의 소재로 삼은 것은 매우 파격전인 일이었습니다.

 

 

 

 

목기깍기(보물 481호)- 선차도

 

목기 깍는 장면을 그린 윤두서의 풍속화

 

두 인물이 선차를 이용하고 목기를 깍고 있는 모습으로 배경의 표현은 없고

인물과 목기를 깍는 용구만 화면하단에 집약 시켜놓고 있는 서민생활을 표현한

조선후기 풍속화의 선구적인 작품입니다.

 

 

 

 

짚신 삼는 노인

 

해남윤씨가전고화첩에 수록되어 있는 윤두서의 풍속화

두 발을 곧게 펴고 엄지 발가락에 끈을 걸어

짚신을 삼는 노인의 표정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수하모정도

 

근경을 중심으로 포치된 두 그루의 나무와 초가정자

그 뒤로 새죽들이 그려져 있고

여백의 미와 붓에 먹물을 슬쩍 스친 듯이 묻혀서 그리는 표현기법을 보여줍니다.

 

 

 

 

경답목우도

 

공재 윤두서의 작품으로 이른 봄날 전원의 풍경을 과장없이 재현한 그림

농부와 목동, 풀을 뜯는 소들의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고

정교한 필체와 다양한 먹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소와 농부의 모습은 사실적이지만

배경은 문인화의 느낌입니다.

 

윤두서의 풍속화는 선비화가 답게 격조와 정취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개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국여지지도(보물 481호)

 

공재 윤두서 선생이 그린 조선후기(1710년)의 우리나라 지도입니다.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대동여지도보다 151년이나 앞선 지도입니다.

 

후손들이 잦은 국난으로부터 지도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항아리에 넣어 보관하다가 늦게 세상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방성도

 

1711년 청나라 강희제때 서양 선교사이면서 훔천감(천문대)에서 일하던

민명아(1639-1712)에 의해 만들어진 천문책

 

이 천문책은 공재 윤두서 선생이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재는 당시 전래된 중국서적을 통해 천문에도 박학다식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여도 (보물 481-4호)

 

공재 윤두서가 그린 고지도로 일본의 지형, 거리는 물론 지방 부호들의 집까지 상세히 그려넣고 있습니다.

<일본여도>는 커다란 크기의 종이 한 장을 이용하여

국토 전체를 대상으로 그린 전도입니다.

 

 

 

 

고산윤선도 유적지의 뒤는 작은 연못이 있으며

이 길은 녹우당으로 이어집니다.

 

공재 윤두서 이후에 낙서 윤덕희(1685-1766)

청고 윤용(1708-1740) ,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는 그림들

이로써 3대에 걸쳐 문인화가 집안을 이루었다고 하지요.

 

해남에서는 해남윤씨가를 빼놓고 지난 시간을 이야기 할 수 없을 듯 합니다.

 

고산윤선도의 어부사시사 겨울노래를 적으며

이 글을 마무리 해봅니다.

 

구름 걷은 후에 햇볕이 두터웠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천지가 막혔으니 바다만은 여전하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한 없는 물결이 깁을 편 듯 고요하다

 

 

고산윤선도유적지 찾아가는 길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1

 

서해안고속국도 종점인 목포 ic-목포에서 국도 2호선과 13호선을 이용해 해남읍-해남읍에서 4km 고산윤선도유적지 이정표-고산윤선도유적지

 

 

아름다운 남도, 해남의 다른 볼거리들을 보시려면 클릭해 보세요~

깊은 숲 맑은 물을 품은 길을 따라 오르다-해남 대흥사 http://blog.daum.net/sunny38/11776080

 

우리나라 최남단 땅끝에서 솟는 붉은 태양을 만나다-해남 땅끝에서 보는 해돋이 http://blog.daum.net/sunny38/11776084

 

산사에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해남 달마산 미황사의 해넘이 http://blog.daum.net/sunny38/11775355

 

철새들의 군무를 보러 떠나볼까요?- 해남 고천암 http://blog.daum.net/sunny38/11775354

 

수려한 암릉- 달마산 http://blog.daum.net/sunny38/10176304

 

500년 된 은행나무가 반겨주는 녹우당 http://blog.daum.net/sunny38/117760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