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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한국 서원의 종가, 도산서원을 가다.

 

 

 

안동을 몇차례나 다녀왔는데, 도산서원을 이제껏 한번도 가본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열심히 다녔다고 자부하는데, 도산서원을 처음 가게 되다니요~

어쨌든 도산서원을 가보고 나서야 처음 온 장소임을 알아차렸습니다.(2010년 9월 4일)

이제껏 다녀왔다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다른 서원과 헷갈린 모양입니다.

 

도산서원의 전교당의 모습입니다.

 

 

 

 

도산서원의 정문을 들어서면 볼 수 있는 전경..

상당한 규모의 서원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도산서원을 여행 해볼까요?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도산 서원까지는 약 500m 정도..

무더운 날에 바람 한점 불지 않으니, 걷기가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닙니다.

일단 낙동강을 끼고 걸어 들어가는 길..

중간에 강가를 조망할 수 있는 조망대도 설치되어 있구요.

 

퇴계 선생은 서원 경내를 중심으로 양편 산기슭이 절벽을 이룬 동쪽을 천연대, 서쪽을 운영대라고 불렀습니다.

서쪽의 천광운영대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시사단의 모습입니다.

 

 

 

 

운영대에 서면 낙동강의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듯한 모습과 강가에 심어진 소나무들..

물속에 비친 시사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강 건너편의 시사단

 

이 비각은 조선시대 지방별과를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정조대황께서 퇴계 이황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그 16년 (1792) 관원 이만수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임금의 제문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다음날 이곳 송림에서 어제(御題)로 과거를 보였는데, 응시자는 7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인 번암 채체공이 지었습니다.

안동댐 수몰로 송림은 없어지고 단만이 현 위치에서 지상 10m 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의 자리를 표해두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댐 수몰로 송림을 볼 수 없어지고..

우리의 후세는 이 단마저도 볼 수 없게 될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조금 더 걸어들어가니 도산서원이 한눈에 보입니다.

 

 

이 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년)에 건립된 것으로 퇴계 이황(1501-1570)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과 제자들이 향사하며 후학을 양성해 온 곳입니다.

영지산을 뒤로하고, 동취병, 서취병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골짜기 안에 안동호를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습니다.

선조가 이름을 내렸고, 편액은 선조 8년에 석봉 한호가 썼다고 합니다.

이 서원은 영남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대원군 서원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입니다.

 

1969년과 1970년에 건물을 보수하고, 유물 전시관인 옥진각을 신축하여 퇴계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도산서원 소유의 고서 1300여종 5000여 책과 퇴계문집을 비롯한 목판 총 37총 2790판은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하여 보관하고 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꽤 큰 규모의 서원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서원은 퇴계 이황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를 가르치던 곳과 그의 사후에 지어진 서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왼편은 역락서재의 모습이며, 오른편으로 난 문은 정문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이제 정문을 통해 서원을 들어가 봅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이렇게 서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왼편이 농운정사와 하고직사..

오른편이 도산서당의 모습입니다.

하나하나씩 차례로 소개드리도록 하지요.

 

 

 

 

 먼저 오른편의 도산서당의 모습입니다.

 

퇴계 이황(1501-1570) 자는 경호 호는 퇴계, 퇴도, 시호는 문순공으로

이기이원론적 주리론을 주장하였지요.

이로서 기를 다스려 인간의 선한 마음을 간직하여 바르게 살아가고, 모든 사물을 순리로 운영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산서당 바로 앞에는 몽천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로 <역경>의 몽괘에서 의미를 취하여 몽천이라 이름하였습니다.

 

 

퇴계 이황 선생은 도산서원에서 사는 뜻을 이렇게 술회하셨습니다.

 

나는 항상 오래 병으로 시달려 괴로워했기 때문에 비록 산에서 살더라도 마음을 다해 책을 읽지 못한다.

깊은 시름에 빠졌다가도 숨을 고르게 하여 때로 몸이 가뿐하고 마음이 상쾌해지면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본다.

그러다 느끼는 바가 생기면 책을 덮고 지팡이 짚고 뜰마당에 나가 연못을 구경하고 절우사를 찾기도 하고

밭을 돌면서 약초를 심기도 하고 숲을 헤치며 꽃을 따기도 한다.

또 혹은 돌에 앉아 샘물 구경도 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보며 여울에서 고기를 구경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친하면서 마음대로 시름없이 노닐다가

좋은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절로 일어 한껏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안에 쌓인 책이 가득하다.

 

 

 

 

우물을 지나 도산서당으로 들어섭니다.

오래된 사립문을 지나...

 

 

 

 

정우당이란 연못과 도산서당의 모습입니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쳐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거처하시던 방은 완락재라 하고, 마루는 암서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퇴계선생은 꽃 중의 군자라는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고 하였습니다.

연꽃은 진흙탕에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속은 비고 줄기는 곧아 남을 의지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맑다

그러하니 꽃 중의 군자가 아니겠는가?  

 

 

 

 

이제 다시 왼편으로 가봅니다.

농운정사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입니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 자 모양으로 짓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를 '시습재'라 하였고,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이라고 하였습니다.

 

 

 

 

농운정사의 서편마루의 모습

이곳 농운정사와 도산서당, 그리고 맨 나중에 소개해드릴 역간서재퇴계 이황선생의 생전에 만들어 진 곳입니다.

 

 

 

 

농운정사 위쪽으로는 하고직사가 있습니다.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는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이곳 서원에는 상, 하 고직사라하여 두 곳이 있습니다.

 

 

 

 

농운정사의 쪽문으로 나와 다시 위로 오릅니다.

 

 

 

 

도산서원의 중심이 되는 전교당으로 들어서는 문인 진도문과 동,서 광명실이 보입니다.

먼저 광명실을 소개하지요.

 

 

 

먼저 서광명실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동, 서 두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를 피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어졌습니다.

 

 

 

 

현판은 퇴계 선생의 친필입니다.

광명은 <많은 책이 서광을 비추어 준다>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동광명실

 

 

 

 

 

진도문을 들어서면 도산서원 전교당과 동재와 서재의 모습이 보입니다.

 

 

 

 

전교당 양편에 마주보고 서 있는 건물은 동재와 서재로

앞쪽의 동재는 박약재라고, 서재는 홍의재라고 합니다.

도산서원의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거처하는 건물로 지어진 곳입니다.

 

 

 

 

그리고 도산서원의 전교당(보물 210호)

 

이 건물은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됩니다.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습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대청과 온돌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인데, 강당인 대청과 거실인 온돌방(한존재)로 구성되었습니다.

 

 

 

 

대청의 전면은 개방되어 있으나 측면과 배면에는 각 칸마다 쌍여닫이 문을 두었습니다.

쪽마루는 건물 뒷면의 대청 뒷부분과 온돌방의 오른편에만 설치하였습니다.

대청의 윗부분은 연등천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산서원의 현판

선조가 이름을 내린 현판의 글씨는 명필인 석봉 한호가 쓴 글씨라고 합니다.

 

 

 

 

전교당은 다른 건물과 달리 단청을 한 건물입니다.

 

 

 

 

전교당 뒤편의 쪽마루

 

 

 

 

전교당 앞 마루에 서서 바라본 서원의 모습

 

 

 

 

전교당 뒤편의 상덕사 부 정문(보물 211호)

 

이 건물은 퇴계 이황을 모시는 사당으로 이를 둘러싼 담장도 함께 보물로 지정 되어 있습니다.

지정 당시에는 흙담이었으나, 도산서원 정비 사업 때 현재의 돌담장으로 바꾸었다는군요.

오래된 단청과 함께 흙담이 그대로 보존 되어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상덕사는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으며 이황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도산서원의 제일 뒤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상덕사 옆에 위치한 전사청

 

 

 

 

전사청에서 내려다본 서원의 전경

전교당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전교당 옆으로 난 문을 들어서니 고직사입니다.

이곳은 상 고직사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고직사가 두 곳이나 되는데도 꽤 크지요?

이 서원의 살림이 매우 컷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고직사의 아궁이와 깨진 솥

 

 

 

 

고직사 부엌으로 난 문을 통해 서원을 바라봅니다.

 

 

 

 

고직사를 나와 다시 돌아보니 무채색에 가까운 나무문..

손길로 한번 쓸어보고 돌아섭니다.

 

 

 

 

고직사 앞에서 바라본 풍경

아까 소개드렸던 하고직사와 농운정사, 유물전시관의 모습이 보입니다.

 

 

 

 

1970년 세워졌다는 유물전시관 '옥진각'입니다.

퇴계 선생이 직접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옥진각 입구의 양쪽에 그림이 한장씩 걸려 있습니다.

강세황이 그린 도산서원도

당시의 도산서원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반대편의 무이구곡도

 

 

 

 

유물전시관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면 역락서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퇴계선생께서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강론할 때 정사성을 비롯한 제자들이 힘을 합쳐 세운 곳입니다.

 

 

 

 

역락서재라는 현판은 퇴계 선생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역락서재에서 바라본 서원

 

 

 

 

서원을 다 둘러보았습니다.

서원은 이렇게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당의 끝에는 강이 자리하고 있구요.

마당 한켠의 우물이 있습니다.

 

 

 

 

이곳 서원에서는 우물에도 이름붙여 주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도산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로 지금도 물이 찰랑거립니다.

역경의 정괘에서 <정렬한천식井洌寒泉食> 에서 의미를 취했다고 합니다.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두레박으로 하나하나 퍼내어 마시듯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심신을 수양해야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다시 주차장으로 걸어 나가는 길..

시사단이 깊어진 하늘과 함께 물 속에 잠겨 있습니다.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겠지요? ㅎ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도산서원..

그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거니는 시간입니다.

 

 

도산서원 찾아 가는 길

 

 

주소: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ic - 35번 국도- 와룡-도산서부 검문소- 도산서원

안동 시내를 들어오시면 도산서원 이정표가 잘 되어 있습니다.

 

관람시간은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00-1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