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행을 떠납니다.
마음에 맞는 이들과 일정을 맞추고, 짐을 꾸리고..
부석사의 노오란 은행나무 길과 붉게 익은 사과를 보러 길을 나섭니다.
영주를 거쳐, 동해의 울진을 들러, 호미곶, 간절곶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가을과 바다를 주제로 길을 나섭니다.
제일 먼저 들른 곳... 소수서원의 정경입니다. (2010년 11월 2일)
소수서원에서 만난 붉은 단풍...
가을 여행의 기쁨 중의 하나이지요.
이제 소수서원을 찬찬히 소개해 보도록 하지요.
부석사를 서너번 쯤 다녀오도록 소수서원을 한번도 들러보질 못했습니다.
부석사에서 꾸물거리다 소수서원에 도착할 때쯤이면, 짧은 가을 해는 이미 서산에 늬엿늬엿~
오후 5시가 넘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소수 서원 바로 앞에서 발길을 돌리기를 두번~
이번에는 부석사를 다음날 이른 아침에 보기로 남겨두고, 소수서원을 먼저 들르기로 합니다.
세번만에 보게 되는 소수서원...
입구의 노오란 느티나무가 환하게 절 맞아 줍니다.
늘 매표소 밖에서 이 소나무들을 보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
300년에서 1000년을 살은 오래된 소나무 숲 사이를 걷다 뒤 돌아보니, 햇살이 저만치 빛나고 있습니다.
송림 숲 한쪽에 당간지주가 보입니다.
유교의 성지라 불리우는 소수서원에 왠 불교유적?
설명을 읽어보니, 이곳은 원래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출토된 유물이나 유적을 살펴보면, 인근의 부석사 못지않게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네요.
이 당간지주 역시 통일신라시대의 것이라고 합니다.
절터에 세워진 서원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숙수사 당간지주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고려 충숙왕 때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의 무대인 죽계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하여 소수서원과 영주 선비촌 사이를 가로 지르는 하천입니다.
죽계천에는 이렇게 돌다리가 놓여 있어, 건널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 죽계천의 풍경이 아름다워, 옛날에는 이곳에 숙수사를 세웠고, 그 숙수사가 있던 자리에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 서원을 세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죽계천 옆에 자리한 취한대
운치있는 자태의 소나무에 둘러싸인 아담한 정자입니다.
퇴계 이황 선생이 경자바위 윗부분에 터를 닦아 대를 쌓고 손수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 '취한대'라 이름하였다지요.
이 정자는 그 당시의 정자는 아니고, 1986년에 신축한 것이라고 합니다.
<취한대>라는 이름은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천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 시 <송취한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경자 바위입니다.
당연히 취한대 쪽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반대편 소수서원 쪽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소수서원을 들어가며 찍은 사진인데, 취한대와 함께 올려봅니다.
주세붕 선생은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후 이 바위에 ‘경(敬)’자를 새기고
“오, 회헌 선생을 선사(先師)로 경모하여 서원을 세우고 후학들에게 선사의 학리를 수계(受繼)하고자 하나 세월이 흐르게 되면 건물이 허물어져 없어지더라도 ‘경(敬)’자만은 후세에 길이 전하여 회헌 선생을 선사로 경모하였음을 전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합니다.
‘경(敬)’은 성리학에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다(主一無適)’는 의미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이 되는 선비들의 지침이며 성인이 되어 가는 지름길과 같아 효경(孝經)과 맹자(孟子)에서는 공경의 뜻으로,
논어(論語)에서는 삼가 근신하는 의미로 풀이했다.
한편 '경(敬)자' 위에 씌어진 ‘백운동(白雲洞)’이란 글씨는 퇴계 이황선생이 새긴 것으로 전해오며,
백운동이란 소수서원의 본래 이름입니다.
취한대 옆에서 만난 붉은 산수유 열매..
붉은 산수유 열매에 끌려 한참을 머뭇머뭇 하였습니다.
물이 맑은 곳입니다.
오후의 햇살에 맑게 빛나고 있는 죽계천...
소백산 남쪽 옛날 순흥 고을
죽계 찬 냇물 위에 흰 구름 드리웠네
인재 기르고 도를 밝힌 공 한없이 우뚝하고
사당 세워 현자를 높임은 우리 나라 효시였네.
우러르고 사모하며 모여드는 저 인재들
학문 닦는 것이 출세를 위함이 아니라네.
옛분 볼 수 없어도 그 마음 느껴지니
차고 맑은 저 냇물에 휘영청 밝은 달빛
- 백운동서원 생도들에게 [白雲洞書院示諸生〕
기유년 풍기군에 부임하여 퇴계 이황-
붉은 담쟁이 덩쿨에게도 눈길을 빼앗겨보구요.
취한대를 지나 조금 위로 가니, 죽계천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가 있습니다.
나무 다리를 지나 다시 소수서원쪽으로 향합니다.
소수서원 뒤쪽의 작은 연못가의 붉은 단풍
소수서원 뒤편의 연못인 탁청지
연못 속의 풍경은 지는 오후의 햇살과 함께 수채화처럼 느껴집니다.
연못을 지나 왼편으로 오르니, 소수서원 입구의 경렴정쪽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소수서원 정문과 그 오른편에 위치한 정자인 경렴정...
경렴정(景濂亭)은 서원으로 들어서기 바로 전에 있는 정자 건물로 유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던 공간입니다.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건립하면서 이 정자를 지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정자 중의 하나입니다.
‘경렴정’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이(濂溪 周敦頤)를 경모하는 뜻에서
그의 호에서 첫 글자‘濂’자를 취했고 안향 선생을 높인다는 뜻에서‘景’자를 취해 붙인 것입니다.
경렴정의 초서 현판은 조선 중기 퇴계의 문인인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의 글씨입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죽계수를 끼고 수령 500년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드리워진 아름다운 정자입니다.
이제 정문인 홍정문을 지나 서원을 향해 들어가봅니다.
서원을 들어가면 이 서원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의 하나인 강학당을 볼 수 있습니다.
백운동이라고 현판이 걸린 강학당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 기능 중의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으며, 팔작지붕의 겹처마로 웅장하면서도 고색이 잘 간직되어 있습니다.
강학당 내부
앞으로는 마루, 뒤로는 온돌방을 설치하였습니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 있습니다.
강학당의 열린 문으로 바라본 마당
건물을 받들고 있는 기둥은 배흘림 양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천정의 대들보에도 단청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당 쪽에서 바라본 강학당의 모습
배흘림 기둥의 모습을 더욱 또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서원은 크게 두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세워지지요.
앞서 이야기한 학문을 강론하는 곳, 그리고 두번째로는 선현을 제향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지요.
문성공묘는 소수서원의 경내에 있는 사당으로 회현 안향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후에 안축과 안보, 주세붕 선생을 함께 모시고 매년 음력 3,9월 초정일에 제향을 드린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서원의 특징은 제향의 대상이 공자와 그의 제자인 성현이 아닌 우리나라 선현이라는 점,
중앙정부가 아닌 사림이 그 설립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이지요.
강학당의 뒤쪽에서 강학당을 바라보고 있는 직방재와 일신재
원장, 교수 및 유사들의 집무실 겸 숙소로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닌 연속된 한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편액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다른 서원의 동재와 서재에 해당하는 건물입니다.
직방재와 일신재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학구재
다음에 소개할 지락재와 함께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입니다.
학구재란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일명 동몽재라고도 합니다.
학구재와 함께 유생들의 거쳐였던 지락재
학구재와 지락재는 스승의 거처인 직방재, 일신재보다 한자(一尺) 낮게 뒷물림하여 지어졌는데
이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윤리 의식을 건축에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락재 뒤곁의 담..
낙엽을 쌓이고, 노오란 단풍은 환하게 물들어 가고..
가을이 이곳에도 이미 깊습니다.
지락재 뒤편으로 난 문을 지나 둘러봅니다.
숙수사의 유물들이 한켠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카톨릭 성당에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듯, 절집의 터 위에 사원이 세워지고..
역사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서원쪽으로 들어가 봅니다.
일영대의 모습이 보입니다.
일영대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윗부분 돌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하지요.
자연석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 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사당 뒤쪽의 영정각
영정각은 회헌 안향 선생의 영정과 신재 주세붕 선생의 영정,
회함 주희, 문충공 오리 이원익, 문익공 한음 이덕형, 문정공 미수 허목 선생의 영정 5점을 봉안하던 장소입니다.
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있으며, 이곳은 복사본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문성공 회헌 안향 선생의 영정(국보 111호)
주자학을 중국으로부터 최초로 수입하여 동방 성리학의 시초를 놓은 분이지요.
회암 주희의 영정
남송시대 주자학자이며 공자의 학문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으로 체계화시켰다고 하지요.
백운동, 소수서원을 지은 문민공 신재 주세붕 선생의 영정 (보물 717호)과
문익공 한음 이덕형 선생의 영정
이덕형 선생의 영정을 그릴 당시 젊은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 특이 합니다.
정료대와 관세대
정료대는 밤에 서원을 밝혔던 조명시설로 윗부분 석재 위에 관솔을 피워 정원을 밝혔다고 하지요.
관세대는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돌입니다.
사백 육십년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라 제목을 붙였었지요?
이제 소수서원에 관한 이야기를 해봐야겠지요?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신재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 서원이라 이름하여 창건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평소 고려말 회헌 안향 선생을 흠모하던 주세붕 선생은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 안향 선생의 고향에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해 1543년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사원의 체제를 갖춘것이 백운동 서원의 시초입니다.
한편 주세붕선생은 ‘ 백운동서원 ' 이라 이름한 것에 대해
“ 왼쪽으로는 죽계수가 휘감아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소백산이 높이 솟아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과 물줄기가 실로 중국 송(宋)나라때 주희(朱 熹 1130~1200) 가 재흥시킨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이 있는 여산(廬山) 에 못지 않다 ”
고 여겨 백록동서원을 본받은 것과 아울러 또한 “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이 있는 골짜기에 가득했기 때문이 다 ” 라고
『회헌선생실기(晦軒先生實記) 』에 적고 있습니다 .
주세붕선생이 안향선생을 배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소수서원에는
이후 1544년(중종39)에 안축(安軸, 1287~1348)과 안보(安輔,1302~1357)가 추가 배향되었습니다.
1546년(명종1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향의 후손 안현(安玹,1501~1560)의 노력으로
서원의 향사와 토지, 서적의 운용과 관리 등에 관한 서원의 운영방책이 보완되고 경제적 기반도 확충되어 서원은 확고한 기반 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1633년에는 설립자인 주세붕 선생이 소수서원에 추가 배향되었습니다.
소수서원 뒤편의 연못인 탁청지
처음에 둘러본 곳인데, 선비촌으로 가기 위해 다시 들르게 되었네요.
소수서원 뒤로 해가 지기 시작합니다.
가을 풍경이 완연한 곳입니다.
나무다리를 통해 다시 죽계천을 건너면 광풍대와 광풍정이 있습니다.
광풍정은 4각 정자로 앞에는 죽계가 감아 돌고 뒤로는 연화산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의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소수서원을 소개하는 글들이 길어졌습니다.
오래 별러서 간 곳이라 그런가요? ㅎ
해가 지기 전에 선비촌으로 바삐 향해야겠네요.
소수서원 찾아가는 길
주소 :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2-8 번지
중앙고속도로 풍기 ic - 931번 국도로 부석사, 소수소원 방면 -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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