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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공연

우리 문화의 발자취 - 국립 중앙 박물관2

전과 다르게 박물관 내에서 사진을 찍을 수가 있더군요, 물론 삼각대와 후레쉬를 사용하지 않는 조건하에서요. 전시관 내부의 전시 유물들 사진 몇 장 찍어 올려봅니다.

전시관이 넓어서 다 둘러 볼 수는 없었지만, 둘러본 곳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올려 봅니다.

동관 1층에 위치한 역사관 전시물들을 올려 봅니다.

 압록강 가의 국경 지도

조선 18세기 초에 중국과의 국경 분쟁이 생긴 이후 압록강 주변의 국경 지역을 그린 지도, 압록강 연안에 배치된 군사 기지인 진, 보의 모습이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고, 강 건너 중국의 마을도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특히 압록강 하구에는 일조으이 군사 초소인 파수도 보인다. 아울러 국경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붉은 선으로 그려져 있다.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전패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빌며 사찰의 불단에 모시던 전패이다. 붉게 옻칠을 가한 사각형의 긴 나무판에 금니로 <세자저하수천추>라고 쓰여 있다.

전패의 형태와 문양으로 미루어 이 왕세자는 숙종의 아들로서 후에 제 20대 경종이 된 분으로 추정한다.

 

                               

 척화비

19세기 들어오면서 서양세력이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프랑스, 미국 등과 교류하지 않는 쇄국정책을 강력하게 추진.

 그 정책의 하나로 도성 및 전국 각지의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서양 오랑캐들이 침범하는 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우리 자손에게 길이길이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라고 적혀있다

 명나라 태조가 제정한 의례

보물 1079호  - 고려말 조선초 14-15세기

 몽골 항아리

중국 원나라, 어깨에 4개의 귀가 대칭으로 달려 있는 항아리로서 주로 침몰 된 배에서 건진 것이 많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신안 해저 침몰선에서 건진 항아리가 있다.

 거란 글씨가 새겨진 거울

중국 요나라, 구리로 만든 거울로 모두 스물 여덟자의 거란 문자가 일곱 줄에 걸쳐 돋을새김 되어 있다. 이들 문자의 뜻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고려와 북방과의 교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불경

고려 11세기,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은 둘다 하나라는 것을 기본 사상으로 하고 있다.

이책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세 종류의 한역본 가운데 동진(317-420)때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진본품 60권 중 제 13권이다.

 중국 도자기

삼국시대(백제) 5세기,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 남조와 문물을 교류하였기 때문에, 백제의 옛 지역에서 중국제 도자기가 많이 발견된다. 공주 수촌리와 천안 용원리의 닭머리 모양 주둥이가 달린 도자기, 우너주 법천리의 양모양 청자, 무령왕릉의 중국 도자기 등이 대표적이다.

 오륜행실도

 조선 정조 21년(1797)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가지 윤리의 모범이 되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엮은 책

효자와 충신, 열녀, 공손한 젊은이, 믿음을 지킨 벗 등 159명의 이야기를 실었다. 수록된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인이고, 우리나라 사람은 17명이다. 판화와 함께 한글 풀이를 넣어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우암 송시열의 초상과 그의 문집

조선 18세기,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여러 글을 모은 것으로 송시열의 삶과 학문, 그리고 사상 등을 살피는 데에 귀중한 자료.

전시된 부분은 이황이 주자의 서로 모순되는 주장 가운데 한 가지만을 집착한다고 비판하는 대목이다.

 

 포은 정몽주의 초상과 그의 문집

조선 영조 45년(1769) ,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다가 비운에 죽은 정몽주(1337-1392)는 충신이기 이전에 빼어난 학자였다. 그는 주자의 <가례>에 따라 가묘를 세울 것을 건의하고 스스로 3년 상을 치르는 등 그 실천에 힘썼다. 그의 문집은 처음 세종 21년에 간행된 후 여러 처례 출간되었는데, 이책은 18세기에 간행 된 것이다.

 이성계의 사리갖춤

고려 공양왕 3년에 이성계가 부인 강씨를 비롯하여 1만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바친 것으로, 1932년 금강산 월출봉의 돌상자에서 발견되었다. 탑 모양의 작은 사리 그릇에 부처의 사리를 직접 넣어 모신 뒤, 이를 다시 팔각형 불당 모양의 그릇에 넣고, 청동그릇과 백자 그릇의 순으로 포개어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목판으로 찍은 대장경

고려 11세기,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이른바 <초조대장경>을 당시의 경판으로 인쇄한 것

 담뱃대의 길이는 신분과 비례한다.

담배는 17세기 전반 조선 광해군 때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담배는 순식간에 조선 사람의 기호식품으로 자리잡게 된다.

당시에 사람들은 담뱃대의 길이가 길수록 신분과 권위가 높은 사람으로 여겼다.

 약을 짜는데 쓰는 틀

20세기 전반

 약재의 무게를 재는 저울, 침통과 침

조선 19세기

 약재를 빻거나 즙을 낼 때 쓰는 기구 -조선 19세기                                                                              쇠로 만든 약연 - 고려

 허준이 쓴 조선시대 의학서적, 동의보감

조선 후기(초간본은 1613년 간행)

 안동권씨 족보의 표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

조선 성종 7년(1476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복제품

안동권씨 족보, 안동권씨 뿐만 아니라 이들과 혼인한 다른 성씨의 인물과 그 자손까지 기재하였다. 안동 권씨 족보는 족보로서의 체재와 내용을 갖춘 현존하는 족보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각종 호패

조선 후기, 조선시대 주민등록증, 조선시대 고위 관리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16새 이상 모든 남자는 국가가 발행한 신분증명서인 호패를 차고 다녀야 했다.

 왕족 익평군 소유 산림의 산림감시원 목패와 세금을 거두는 관리의 패

조선 후기

                              

 고위 관리의 호패

조선 정조 8년

 역마 이용권, 마패

조선 전기

 박준달의 호적표

조선 건양 2년(1897)  충청남도 홍산군 남면 마동리 제 6통 제 3호에 거주하는 농민 박준달의 호적표이다. 이 호적표에는 부인 문씨, 아들과 딸 각 한 명 등 4인 가족이 기재되어 있다. 개별 가호에서 가족 사항을 적어 관청에 신고하는 조선시대의 호구단자와는 달리, 관청에 의해 정해진 양식에 따라 가족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호적이 있었다니, 신기하네요. 이 당시에는 전체 인구를 파악하기 위해서 호적을 3년마다 작성하였다고 합니다.

 오영록에게 발급한 호적등본

조선 현종 10년(1669), 1669년 순천부에서 관내에 거주하는 오영록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오영록의 가족과 소유노비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적혀있다. 준호구는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 관청에서 보관중인 호적대장에서 기재된 해당 호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 발급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호적등본 또는 주민등록 등본과 비슷한 자료이다.

 보부상의 도장고 도장함

19세기 말-20세게 초, 조선 말기부터 충청남도 임천, 은산, 홍산 일대에서 활동한 보부상이 사용하던 도장함 3점과 도장. 보부상 조직의 임원이었던 영위, 반수, 장무원등이 사용하던 것들이다. 영위는 최고 고문에 해당하며 다음 직책이 반수이다. 장무원은 실무를 담당하였다.

 조선 후기의 동전 꾸러미와 돈궤

 청동으로 만든 저울 추와 저울대 그리고 저울

 열쇄패

 조선의 대표 동전 상평통보와 (왼쪽)  오른쪽은  당일전, 당오전, 당이전, 당백전(시계 방향 순)

 고려의 동전, 건원통보, 해동통보

 옥으로 만든 책

 금으로 만든 책

 고종황제의 인장과 명성황후의 인장

 

 화성친행도

정조 19년, 정조가 화성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참배하러 가는 행차의 모습을 그린 것

정조는 재위 기간 중 현륭원을 13번 다녀왔는데,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이 되는 1795년의 행차가 가장 크고 화려했다.

                             

 경복궁 근정전의 닫집과 어좌

닫집은 본래 존귀하고 신성한 분과 그 형상에 먼지, 비바람, 태양빛 등이 직접 닿지 않게 하기 위하거나 신성하고 위엄스럽게 보일 목적으로 건물안에 설치한 작은 집이다. 당가, 운궁이라고도 하였다.

 동궐도

순조 26-31년 국보 249호의 복제품

조선의 여러 왕궁 가운데 가장 크고 으뜸으로 삼은 왕궁은 경복궁이며, 그 별명은 북궐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창덕궁와 창경궁을 함께 그린 이 동궐도는 왕궁의 그림을 담당한 도화서의 화원이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