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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행(india)

일곱 바퀴를 돌며 소원을 빌면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사르나트 유적군-인도7

 

 

 

불교의 4대 성지의 하나..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뒤 처음으로 설법을 편 곳..

사르나트.

 

사르나트의 두번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현장법사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30여개의 사찰과 3,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 라고 적혀 있던 사르나트.

 

이제는 다멕 스투파를 제외한 다른 유적은 모두 기단 정도만 남아 있어

원형 그대로의 모습들 찾아 볼 수가 없지만,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넓습니다.

 

 

 

 

사르나트 유적군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갖추고 있는 다멕 스투파..

일곱 바퀴를 돌면서 소원을 빌면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두손을 모으고, 향을 피우며,

열심히 일곱 바퀴를 돌고, 또 돕니다.

 

 

 

 

이제 사르나트 유적군을 찬찬히 둘러볼까요?

 

사르나트 유적군은 사르나트의 상징인 다멕 스투파를 비롯해

다마라지까 스투파, 아쇼카 석주, 사슴 동산이 모여 있습니다.

 

사르나트는 사슴(mr.ga)의 동산(da-va)이란 의미로 ‘녹야원(mr.gada-va)’이란 이름과 더불어,

선인(r.s.i)이 떨어진(pat) 곳이란 뜻의 ‘르시빠딴(r.s.ipattan)’ 등의 이명이 있습니다.

 

 

 

 

 

30여 개의 사찰, 3,000여명의 승려가 머물던 곳은

이제 벽돌더미만 남아 있지만,

남은 폐허의 규모도 대단하여 옛시절을 짐작케 합니다.

 

 

 

 

붓다가 사르나트를 첫번째 설법 장소로 택한 이유는

자신과 함께 깨달음을 얻고다 정진했던 다섯 명의 도반 때문이었습니다.

 

다섯 도반은 싯다르타와 함께 식사도 거르고 잠도 자지 않으며 육체적 고행을 실천했지만

고행만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진리를 터득한 싯다르타가

처녀 수자타에게 우유죽(또는 유미죽이라고도 함)을 공양받자

‘배반자’라고 욕하고 실망하며 싯다르타의 곁을 떠납니다.

 

 

 

 

그 후 인도 북동부 보드가야에서 대각을 성취한 붓다는 한동안 망설였다고 합니다.

깨달은 바가 너무나 미묘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해 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연꽃이 떠올랐습니다.

진흙 속에 살면서도 진흙탕의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는 연꽃.

‘그래, 연꽃과 같이 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

붓다는 법을 전하기로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자신의 지혜를 나누는 첫번째 대상으로 다섯 도반을 선택합니다.

여전히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 고행을 하고 있던 그들을 첫 설법 대상자로 삼았습니다.

다섯 수행자는 꼰단냐, 왑빠, 밧디야, 마하나마, 앗사지 등이었습니다.


멀리서 걸어오는 부처님을 본 그들은 못 본체하고 침묵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다가오자 그들은 불이 타들어오는 조롱 속에 있는 새처럼 불안해져,

처음의 약속을 잊은 채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옛날과 다름없이 부처님을 맞아 시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3의(三衣)와 발우를 받아들고,

어떤 이는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어떤 이는 발 씻을 물을 떠오는 등 서로 다투어 시중을 들었다고 하지요.

 

 

 

 

붓다가 다섯 도반에게 처음으로 행한 설법인 초전법륜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다멕 스투파..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은 붓다가 남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사르나트로 향하고 있습니다.

 

 

 

 

벽돌 더미만 남은 폐허 속에서도,

 

 

 

 

바람이 살랑~ 부는 나무 아래에서도,

붓다가 남긴 이야기들에서 깨우침을 찾고 있습니다.

 

 

 

 

지름이 28.5m이고, 높이가 34m로 거대한 원형 탑인 다멕 스투파..

 

 

 

 

11.2m 까지는 큰 돌을,

그 위부터는 벽돌을 쌓아 완성한 스투파입니다.

 

 

 

 

탑의 하단은 마우리아 양식으로,

상단은 굽타 양식으로 지어져 있어

막연하게나마 아쇼카 대왕 시절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우리아 양식과 굽타 양식..

전에 학교에서 분명히 배운 기억은 나는데 말입니다^^

 

* 마우리야 양식

마우리아 왕조의 문화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인하여 조국에서 인도로 피난해 있던 페르시아의 예술가, 장인(匠人), 학자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카로시티 문자가 보급되었는데, 우측에서 좌측으로 쓰는 방식은 아람문자에 기원을 둔 것이다.

건축에 관해서도 확실히 이란에 기원을 둔 양식(樣式)이나 그것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채용되었으며,

파탈리푸트라의 궁전이나 아소카 왕 석주(石柱)의 주두(柱頭) 같은 유물에 그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 사전 중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굽타 양식

굽타제국의 번영에 수반한 인도 국민문화의 흥륭과 전인도적인 확산은 미술에서도 새로운 예술이념과 세련된 기법에 의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인도미술 사상으로 본다면, 굽타 시대에 성립한 미술이 굽타왕조가 붕괴한 이후 하르샤왕 1대까지 이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약 350∼650년의 기간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우선 조각에 있어 쿠샨왕조 시대를 대표한 3가지 미술에서 시작하여 불상 ·보살 등의 조상(彫像)제작이 중심이 되었다.

먼저 굽타 세력권 밖에 있던 북서지방에서는 간다라의 헬레니즘 계 미술이 전시대의 석조(石彫)를 대신하여 소조미술(塑造美術)로서,

4세기 말부터 단기간이나마 번영하여, 스타코 및 점토로써 하는 소조분야에서 일단 기법상으로 완성되었다.

이 시대의 건축은 석굴을 제외하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두타대백과사전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다멕 스투파도 군데군데 훼손이 되어 있지만,

비교적 조각의 보존 상태가 좋은 곳도 있습니다.

 

 

 

 

연꽃 위에 앉은 붓다(?)의 모습..

 

 

 

 

빛깔이 바랜 곳도 있고..

 

 

 

 

저 위의 파인 홈에는 원래 무엇이 있었을까요?

궁금증이 일지만, 누구도 저곳에 무엇이 있었을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30여개의 사찰과 3,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던 사르나트..

이슬람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사르나트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1835년 영국 왕립 고고학회의 발굴 작업으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불교국이 아닌 인도..

그 속에서의 사르나트..

 

 

 

 

이곳을 보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옵니다.

 

 

 

 

그리고 이곳, 다멕 스투파 주변을 일곱 바퀴를 돌며,

자신만의 소원을 빕니다.

 

 

 

 

향을 피우며 돌기도 하고, 염주를 굴리며 돌기도 하는..

 

 

 

 

여행자는 다멕 스투파 앞에 서서 소원을 빌며 도는 이들의 모습을 담습니다.

모두 각자 인생의 길이 다르듯이,

이곳을 도는 이들의 표정도 같은 이가 하나도 없다는..

 

 

 

 

거대한 원형 탑인 다멕 스투파를 돌며

지난한 인생길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고민, 번뇌, 상념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사람들...

 

 

 

 

붓다의 가르침이 늘 함께 하기를 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835년에 알렉산더 커닝햄이 이 탑의 내부를 조사해

정확한 용도를 알아보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고도 합니다.

 

 

 

 

먼 곳에서 온 이방인들도 스투파를 돌며

소원을 빌어 봅니다.

 

 

 

 

불교의 경전을 오색 깃발에 적어 매달아 놓기도 하였습니다.

티벳 불교의 흔적들을 이곳에서도 만납니다.

 

 

 

 

그리고 2,800년 전에 심어진 보리수 입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는 보드가야에 있으니

이 보리수는 붓다가 첫 설법을 하는 것을 지켜 보았던 보리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옆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이 보리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멕 스투파 옆으로는 수많은 유적군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난다여, 무상(無常)인 것은 고(苦)인가, 낙(樂)인가?’

‘대덕이시여, 그것은 고입니다.’

‘그러면 무상이며, 고인 것을 바로 내 것이며, 내 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 속에서 자기 소유라고 집착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묻고 있는..


 

 

 

 

 

 

 

 

 

 

 

 

 

 

다멕 스투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슴공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사슴공원으로 인해 이곳이 녹야원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합니다. 

 

이곳은 원래 사슴을 위한 숲으로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시다르타가 여러 번 환생하였던 장소입니다.  

 

부처님의 전생담에 의하면,

이곳엔 예전에 각각 500마리에 이르는 두 무리의 사슴 떼가 있었다고 합니다.

바라나시왕이 즐겨 사냥을 하였는데 잦은 사냥에 몰살될 것을 두려워한 사슴왕은

매일 한 마리씩 스스로 공물로 바칠 것을 약속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새끼를 밴 어미사슴이 사슴왕에게 사정하자 어미로서의 자비를 가상히 여긴 사슴왕은 자신이 대신 바라나시왕에게 나아갔으니,

전후사정을 들은 왕은 인간보다 나은 사슴들의 자비심에 사냥이나 공물을 중지하고 사슴들로 하여금 평화롭게 살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슴의 동산이란 뜻의 ‘므르가다와(mr.gada-va)’란 지명과 더불어,

사슴(sa-ran.ga)의 왕(na-tha)이란 의미로 ‘사랑가나타’라 불리기도 했었는데,

뒤의 지명이 일부 줄어 지금의 ‘사르나트(sarnath)’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슴공원을 둘러보고 다시 사르나트 유적군들 사이를 걷습니다.

 

 

 

 

인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우람한 나무들..

나무에도 꽃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도에는 원래 종교라는 말이 없었다고 하지요.

그들의 삶 자체가 종교적이기 때문이 굳이 종교라는 말이 필요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이 될 수 있는 나라..

그래서 어쩌면 그들은 자연과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을 열심히 담고 계신 스님의 모습을 몰래 한장 담아봅니다^^

멋진 포즈로 멋진 사진을 담고 계시는.. ㅎ

 

 

 

 

다섯 도반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법을 펼쳤다는 곳에는

단이 남아 있고, 그 단에 금박을 입히며 사람들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다마라지까 스투파..

 

 

 

 

붓다가 처음 설법을 행한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세운 스투파로

앞의 기둥이 모두 금박으로 입혀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도의 흔적...

 

 

 

 

이 스투파는 아쇼카 대왕이 처음으로 스투파를 세운 뒤

무려 여섯 번에 걸쳐 보완 공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30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는데

지금의 모습에서 그 당시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794년에 바라나시의 마하라자가 자신의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벽돌로 쓰기 위해 헐어버렸다는..

 

 

 

 

 

 

 

 

 

 

 

 

 

 

 

 

 

 

 

 

 

 

 

 

 

 

 

 

 

 

 

폐사지와 다멕 스투파..

 

눈을 감고, 30여개의 사찰이 있던 시대를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아쇼카 석주..

 

지붕이 둘러진 저곳에 자리한 것이 아쇼카 석주입니다.

 

 

 

 

사르나트의 아쇼카 석주는 대부분이 파괴되고 하단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나마 석주의 상단을 장식했던 사르나트 사자상은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사르나트 사자상~

사진 촬영이 안되는 곳이라 책에서 한장 모셔와봅니다.

 

 

 

 

1,800년대 이곳을 발굴하면서

한세기가 넘도록 이 지역은 마구잡이로 파헤쳐졌다고 하지요.

 

많은 유물들이 골동품 수집상들에게로 넘어가고

영국 관리들은 강 건너 편 바루나 다리를 보강하는데 이곳을 돌들을

수레 60대 분량을 가져다 쓰기도 하였다지요.

 

 

 

 

외국의 침략,

힌두교의 부흥과 함께 나타난 불교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

자연적 재난, 종파의 분열..

 

이 모든 것들을 딛고 살아남은 유물들,

오래도록 남은 유물들이 보존 되기를 바래보는 여행자입니다^^

 

사진은 사르나트 유적군 앞에서 다양한 형태의 부처상을 팔고 있던 상인의 모습입니다.

 

붓다에 관한 글들을 아직 못보셨다면 클릭해 보세요~

신발을 벗고, 마음을 내려놓고 돌아보는 붓다의 탄생지-룸비니 마야데비 사원 http://blog.daum.net/sunny38/11775990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죽은 '붓다의 열반지'-쿠쉬나가르의 열반당 http://blog.daum.net/sunny38/11775995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죽은 '붓다의 다비장터'-라마바르 스투파 http://blog.daum.net/sunny38/11775996

 

붓다의 일생을 벽화로 볼 수 있는 사르나트의 몰라간다 꾸띠 비하르  http://blog.daum.net/sunny38/11776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