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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1박 2일동안 둘러봐도 다 못볼 것 같은 국립경주박물관3-미술관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

신라의 문화유산을 한 눈에 살펴보기 위해 꼭 들러야 하는 곳,

국립경주박물관입니다. (2011년 10월 12일)

 

국립경주박물관의 세번째 이야기..

옥외전시장, 고고관에 이어 미술관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미술관은 신라 천년의 미술문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곳으로

1층에 불교미술1실과 불교미술2실, 2층의 금석문실과 황룡사실이 있어

약 400여점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의 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곳입니다.

 

미술관의 대표되는 미술품 몇점 먼저 올려봅니다.

 

사진은 생의사석미륵불이라 불리우는 미륵삼존불의 모습입니다.

신라 634년 만들어진 석불입니다.

 

유홍준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1권에 삼화령 애기부처로 소개된

그 부처님이지요.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서 다시 하겠습니다.

 

 

 

 

그리고 신라 혹은 경주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이미지 가운데 하나인

얼굴무늬 수막새입니다.

 

경주 영묘사 터 출토/ 1350-1400년 전 신라 7세기 전반

 

신라의 미소라 불리울만 하지요?

 

 

 

 

경주 황룡사 터에서 출토된 망새

신라 7세기

 

이 기와는 용마루 끝에 올려지는 것인데

이 치미가 이렇게 큰 것으로 보아 황룡사의 규모가 어떠했을지 상상해 봅니다.

 

 

 

 

이제 국립경주박물관의 미술관~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해 볼까요?

 

미술관 앞 마당에는 석가탑과 다보탑의 모형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불교미술1실

 

신라 불교의 흐름에 따라 각 시기를 대표하는 불교미술품을 전시한 곳으로

영묘사 터에서 나온 얼굴무늬수막새, 분황사 모전석탑 사리갖춤 등이

대표적 전시품입니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면 여행자를 맨처음 맞이하는 것은

석굴암 문수보살, 십일면관음보살, 보현보살입니다.

통일신라 8세기/ 석굴암

 

석굴암 본존불 바로 뒤에 있는 보살들을 일제강점기에 석고로 본뜬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복제품이지만, 평소에 유리창 너머로 잘 볼 수조차 없었던

석굴암의 보살들..

그 아름다움에 빠져봅니다.

 

 

 

 

석굴암의 보살들 사이에 금강역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통일신라 751년/ 석굴암 출토

 

 

 

 

천불소탑

통일신라 시대 751년/ 석굴암 출토

 

천불탑은 서역에서 동아시아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탑의 형태이기는 하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유물입니다.

 

탑(pagoda)는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탑파'의 준말이라고 하지요.

초기 불교에서는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서역에서는 사리를 모시는 반구형이 대부분이엇으나 중국을 거치면서 목조건축물과 비슷한 형태로 바뀌었으며

중국에는 벽돌을 쌓은 전탑, 한국에서는 화강암을 깎아 만든 석탑, 일본에는 목탑이 많은 편입니다.

 

 

 

 

정면에 자리한 약사불

8세기말-9세기초 /경주 남산 용장골 출토

 

불상은 원래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 유래했다기보다는

불교와 그리스문화가 만나서 형성되었던 간다라의 영향을 받은 종교적 상징으로

다양한 재질과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불교에서 신앙의 중심이 탑에서 불상을 모신 불전으로 바뀌었는데

아마도 탑에 모실 부처님의 사리가 현실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습니다.

 

모든 질병뿐만 아니라 무지의 병까지도 고쳐준다는 약사불입니다.

그런데 약단지를 빼면 석굴암 본존불과 그 모습이 비슷합니다.

오른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의 항마촉지인,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모습 등이

석굴암 본존불과 닮은 것입니다.

 

석굴암 본존불이 만들어진 다음부터 곧바로 그 불상을 닮은 상이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 역시 그러한 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화려해진 광배는 9세기에 유행한 것으로

이로 미루어 보아 8세기 말에서 9세기초의 약사불로 추측됩니다.

 

 

 

 

불두와 금강역사

 

금강역사가 새겨진 돌기둥은 경주 하동의 어느 절터에 있던 것입니다.

부처를 상징하는 탑에 금강역사를 장엄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토록 부처님을 지키고 부처님의 말씀을 섬기겠다는 신라인의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봐야할 듯 합니다.

 

 

 

 

보살

통일신라 8-9세기 / 경주 충효동 출토

 

눈을 감고 있지만,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어려있는 듯 느껴집니다.

 

 

 

 

 

 

신라의 미소..

신라의 얼굴 이라 불리우는 얼굴무늬 수막새

 

미소를 한껏 머금고 있는 이 막새기와는 신라 혹은 경주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 얼굴이 새겨진 기와는 익산 미륵사터, 경주 황룡사 터등에서도 출토되었지만

이 막새기와에 사람 얼굴을 나타내는 것은 이 기와가 유일합니다.

 

이 기와는 일제강점기 영묘사 터(현재 흥륜사)에서 나왔다고 전하며

한 일본인이 보관하다가 1972년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한 것입니다.

 

가장자리 테두리가 넓고, 높은 온도에서 구운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시대에 만든 것으로 여겨집니다.

 

 

 

 

칠처가람이란 부제 아래~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재위 514-540) 14년인 527년의일입니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은 귀족들의 반발을 이차돈의 순교로 잠재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차돈이 천경림에 절을 지은 것에서 귀족들이 반발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천령림은 불교 유입 이전에 신라 사람들이 신성시하던 곳으로 하늘에 제사 지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유사'에는 흥륜사를 비롯한 7곳의 전불시대 절터가 있는데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사천왕사, 영묘사, 담엄사 등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불국토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신라 땅이라는 신라 사람들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절들이 들어선 곳은 신라에서 전통적으로 신성시되던 곳이라는 점과

불교 공인 후 얼마되지 않아 절들을 그곳에 세운 점으로 보아

얼마나 빨리 신라가 불교국가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진은 사자무늬 수막새

통일신라 8-9세기/ 경주 흥륜사 터 출토

 

 

 

 

연꽃무늬 수막새

신라 6-7세기 전반 /경주 흥륜사터 출토

 

 

 

 

영묘사가 새겨진 암키와

통일신라 8-9세기/ 경주 영묘사 터 출토

 

영묘사는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로 박혁거세능이 있는 오릉 북쪽편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창건 후 선덕여왕이 이 절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로 백제의 복병을 감지했다는 일화를 남긴 사찰입니다.

 

 

 

 

용얼굴무늬 기와

통일신라 8-9세기/ 경주 영묘사터 출토

 

신라 최고의 조각가인 양지스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실적이고

힘찬 표현이 돋보이는 유물입니다.

 

 

 

 

연꽃, 보상화무늬 수막새

가운데는 넝쿨무늬 암막새

연꽃무늬수막새

 

통일신라 8-9세기/ 경주 불국사 출토

 

 

 

 

연꽃무늬수막새와 연꽃,보상화무늬수막새

통일신라 8세기 중반-9세기/ 경주 석굴암(석불사) 출토

 

 

 

 

분황사석탑사리갖춤

신라 634년/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출토

 

이것들은 1915년 분황사 모전석탑을 수리할 당시 발견되었던

석함 속에 있던 사리갖춤과 각종 공양물입니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인 634년에 조성된 절로

이 사리갖춤이 있던 모전석탑 역시 같은 때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리는 비단에 싸여 은합 안에 있었으며 이밖에도 수정, 금바늘, 바늘통, 가위, 집게, 조개 등의

공양품도 함께 납입되었습니다.

 

분황사 석탑은 고려시대 때에도 한번 수리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북송 때의 동전인 송녕중보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왼쪽부터 바늘, 바늘통, 가위, 쪽집게 -선덕여왕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운데는 상림오수전 - 중국 북제(550-577년)에 사용한 동전과 북송 때의 동전인 송녕중보

마지막은 수정, 향유병, 장신구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발견된 것들로 비교적 초기의 사리갖춤으로 짐작됩니다.

 

분황사모전석탑의 공양품들입니다.

 

 

 

 

사리그릇, 은제 사리합

고려 12세기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출토

 

 

 

 

신라왕경

칠처가람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황룡사목탑찰주본기

통일신라 872년/경주 황룡사 터 구층목탑 출토

 

흔히 황룡사 찰주본기로 일컬어지는 금동판은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 심초석의 사리구멍 안에 있던 사리갖춤 가운데 내함으로

언젠지 알 수 없으나 도난 되었다가 1966년에 되찾은 것입니다.

 

금동판 네 개를 경첩으로 연결시켜 네모난 상자가 되는데

한면은 물고리가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 앞뒷면에는 부처와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과 신장이 각각 2구씩 새겨져 있습니다.

나머지 세면에는 황룡사 구층목탑을 만든 경위와 탑이 기울어 경문왕 때인 871년 탑을 고친 내용 등을 새겼습니다.

 

구층목탑을 세운 경위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과 큰 차이가 없는데

자장이 삼한의 통일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황료사 구층목탑을 세우자고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이간 용수를 감독으로 하고 백제 장인 아비지를 대장으로 삼아

높이 225자(약80m)의 목탑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감은사 사리갖춤(보물 366호)

통일신라 682년/ 경주 감은사 터 서삼층석탑 출토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을 기리기 위해 그 아들 신문왕이 682년에 완성한 감은사 서탑의 사리갖춤..

1959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3층 탑신 윗면에 뚫린 장방형의 구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리갖춤은 제일 안쪽에서부터 수정사리병, 사리기, 금동사리외함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리외함에는 사천왕을 따로 만들어 부착하였습니다.

 

서역인을 연상시키는 이국적인 얼굴과 사실적이고 험상궂은 표정

힘찬 자세, 치밀하게 묘사된 갑옷 들 통일신라 초기 사실적인 조각양식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서탑 사리갖춤 내함

하나의 작은 불전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청동불 입상/ 통일신라 8-9세기 경주 불국사 출토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복제품(국보 126호)

통일신라 751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 출토

 

 

 

 

사리탑과 사리병

청동 사리장엄구 유리사리병

통일신라 8-9세기

 

 

 

 

봉화 서동리 동탑 사리갖춤

통일신라 9세기

 

경상북도 봉화군 서동리에 있는 쌍탑 가운데 동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갖춤으로

1962년 이 탑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되었습니다.

 

1층 탑신 윗면에 사리를 안치할 수 잇는 구멍을 뚫고 그 안에 5과의 사리를 담은

녹색 유리사리병, 도 다시 그것을 담은 곱돌 사리그릇 뿐만 아니라

흙으로 빚은 99개의 작은 탑을 봉안하였습니다.

 

 

 

 

봉화 서동리 동탑에 봉안된 99개의 흙탑

 

탑은 틀로 찍어 구운 다음 하얀색 호분을 발랐으며

탑 바닥에는 구멍을 뚫어 다라니경을 넣었습니다.

이 구멍은 다시 나무 마개로 막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탑을 탑에 봉안하였을까요?

'무구정광대다리경'에는 77개 혹은 99개 탑을 만들고

그 안에 다라니를 넣어 탑 안에 봉안하면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고 죽어서는 도솔천에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팔부중

 

팔부중은 위로는 불법을 수호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존재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팔부중은 무장한 모습을 띠게 되었지만,

그 자세나 들고 있는 지물은 정해지지 않고 제각각입니다.

 

 

 

 

부처를 수호하는 불타팔부중과 사천왕의 권속인 사천왕팔부중으로 나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불타팔부중을 조성하였습니다.

 

석탑의 상층기단에 새겨진  팔부중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탑이 부처를 의미하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부처를 지켜주는

팔부중과 사천왕을 탑에 새겼던 것입니다.

 

 

 

 

사천왕

통일신라 679년/경주 사천왕사 터 출토

 

경주 낭산 기슭에 있는 사천왕사 목탑 기단 벽면을 장식했던 전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사천왕사는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기 위하여 문무왕 19년인 679년에 지은 절입니다.

 

역시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전은 양지스님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신체 비례. 치밀하게 묘사된 갑옷, 고통스러워하는 악귀의 사실적인 모습이 특징인데

통일신라 초기 사실주의 조각의 정수라 해도 모라라지 않습니다.

 

사천왕사에 대한 최근 발굴에서 탑 기단부에는 중앙의 게단 좌우에

3종류의 사천왕상 전을 부착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중앙에 부착되었던 사천왕상

 

 

 

 

좌측에 부착된 사천왕상

 

 

 

 

사자

통일신라 8-9세기

 

 

 

 

금동불이란 부제아래~

 

금동불은 동의 제련과 합금, 주물, 도금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숙련된 주조기술과 당시 상당한 고가였던

동과 밀납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금동불을 많이 만들었을까요?

정교한 조각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내구성 또한 뛰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경전에서 일컫는 것처럼 부처의 몸에서 나는

황금색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금동일광삼존불

신라 6세기 후반

 

 

 

 

금동반가사유상

신라 7세기 전반

 

 

 

 

금동 반가사유상

신라7세기 전반

 

 

 

 

반가사유상 머리

신라7세기 전반/경주 황룡사터 출토

 

 

 

 

금동불입상

신라 9세기말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좁게는 여래상,

넓게는 보살상과 신장상까지 포함합니다.

 

부처에 관한 글입니다.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약사불, 아미타불..

 

사진 위에 놓고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불상의 명칭

 

 

 

 

보살에 관한 설명

 

 

 

 

평상시 늘 헷갈리고 궁금하던 것들인데

사진과 함께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올려봅니다.

 

 

 

 

보살상의 명칭

 

 

 

 

마지막으로 부처의 손갖춤

 

 

 

 

불교미술 2실의 전경

 

불교조각품을 유형별, 시대별로 구분하여 신라 불교 조각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도옥 한 곳으로

남산 장창골 미륵삼존불, 백률사 약사불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국보28호)

통일신라 8세기 후반 /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

 

소금강산은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갔다고 한 곳으로

신라인들에게는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약단지를 쥔 손이 없는데도 약사불로 부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 사진집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왼손에 약단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체의 양감이 두드러졌던 8세기 중엽 불상과 달리 다소 밋밋해졌지만,

입가에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서 8세기 중엽 불상에서나 볼 수 있는

종교적 숭고미가 느껴지는 것으로 미루어 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관음보살 (왼쪽)

통일신라 9세기/경주 분황사 출토

 

원래 머리와 몸체가 떨어져 있던 것을 붙였습니다.

이 보살상은 동그란 얼굴, 감은 듯 만 듯한 눈, 짧은 코, 좁은 어깨, 왜소한 신체,

대좌의 화려한 연꽃무늬장식이 특징인데

이러한 특징은 9세기 불상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관음보살은 보관에 화불이 새겨져 있고 정병을 들고 있습니다.

보관에 화불을 새긴 이유는 <관무량수경>에 관음보살의 보관에 화불이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청관음경>에 나오는 관음보살이 맑은 물과 버드나무 가지로 병든 사람을 고쳤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물을 형상화 할 수 없으니 물을 담는 용기인 정병으로 이를 대체한 것입니다.

 

자비의 화신이라는 관음보살의 이미지를 극대화 하고자

정병을 든 모습의 관음보살을 조성하였던 것입니다.

 

 

십일면관음보살입상(오른쪽)

통일신라 8세기/ 경주 낭산 출토

 

큰 얼굴과 머리 위 중앙 화불 주위의 얼굴까지 합하여 총 11개의 얼굴이 있어

십일면관음보살이라고 합니다.

 

경전에 따르면, 정면의 세 얼굴은 보살의 모습인데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왼쪽의 세 얼굴은 분노하는 모습으로 슬픈 마음을 일으켜 악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며

오른쪽 세 얼굴은 흰 이를 드러낸 모습인데 바르게 행하는 사람을 더욱 권면하기 위한 것입니다.

뒤쪽 얼굴 하나는 웃는 모습으로 모든 중생을 웃음으로써 거두어 들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관음보살을 모신 대표적인 사찰로 남해 보리암,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가 있습니다.

 

 

 

 

왼편부터 약사불, 경주남산 출토

중앙은 석조불입상 /경주 남산 도당산 토성출토

오른편은 석조불입상 /8세기 경주읍성 출토

 

 

 

 

경주 남산 장창골 미륵삼존불

삼화령 미륵삼존불이라고도 부릅니다.

 

정식명칭은 생의사 미륵삼존상이라고 합니다.

 

이 석불은 본래 남산 삼화령 고개에 있던 것인데 1925년 본존불을 박물관으로 옮겨오고

또 민가에서 훔쳐간 협시보살 2개를 압수해서 지금 이곳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선덕왕 때.. 꿈에서 깬 생의가 표시해 놓은 곳을 찾아 땅을 파니 과연 돌미륵이 나왔다.

생의는 그 돌미륵을 삼화령에 옮겨 놓고 선덕왕 3년 그 곳에 절을 짓고 살았는데.."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634년 선덕왕 3년, 경주 남산 삼화령 생의사에 있던 미륵불이라는 것입니다.

 

-이 삼존불은 참으로 귀엽게 생겼다.

모두 4등신의 어린아이 신체비례를 하고 있어서 그 앳된 얼굴의 해맑은 웃음이 보는 이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는다.

특히 왼쪽의 협시보살입상은 비록 코가 깨졌지만 불심과 동심의 절묘한 만남을 느끼게 해준다

언제부터였을까?  삼화령 고개에 오른 사람들은 이 애기 모습의 보살상을 보면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매만져 보았다.

그 이름도 '삼화령 애기부처'라고 바뀌었다. -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의 경주편에 소개된 글 중에서

 

그리고 애기부처의 발가락이 새카맣게 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왼편의 협시보살의 발이 새카맣긴 하네요.

박물관에 온 아이들이 이 부처가 귀여워 자꾸 만져보다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존불의 발도 새까맣습니다^^

 

 

 

 

반가사유상(반가사유상의 앞모습과 옆모습)/경주 송화산 출토

 

커다란 돌 하나로 조각한 반가사유상입니다.

머리와 두 팔은 깨어져 남아 있지 않지만 남은 높이로 보아 건장한 성인 남자의 신체에 가깝습니다.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왼 무릎에 올리고, 벗은 윗몸에 목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아랫몸에 걸친 치맛자락은 서로 겹치어 주름지고 끝자락에서 물결을 이룹니다.

발가락과 발톱까지 나타낸 왼발은 연꽃을 딛고 있습니다.

바위에서 연꽃이 막 피어올라 성스러운 부처님의 발을 받치고 있는 듯 합니다.

 

경북 봉화 출토 반가사유상에 비해 조형미는 다소 떨어지지만

신라 특유의 고졸한 멋이 살아 있습니다.

 

조각하기 까다로운 화강암에 신라 장인의 불심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얿어진 머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요?

 

 

 

 

우리나라 반가사유상과 인도,중국, 일본의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 왕자였을 때

인생의 번뇌로 깊이 사색하는 젊은 싯다르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반가사유상이 지닌 특색은

사색하는 부처님의 깊고 맑은 정신적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 6세기부터 약 백년 동안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는데

대부분 독립된 보살상 형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미술관의 또 다른 전시실인 금석문실로 향합니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밝혀줄 수 있는 문자자료인 금석문을 전시한 곳으로

임신서기석, 문무왕비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신라의 금석문-

신라에서 언제부터 문자를 사용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호우총에서 나온 청동호우를 보면 광개토대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글이 새겨져 있어

늦어도 5세기 이전에는 신라에도 문자가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6세기에 들어서서 신라는 영일 냉수리비, 진흥왕 순수비, 남산신성비 등

많은 긴 문장을 돌에 새긴 비석을 남길만큼의 수준이 되었습니다.

 

사진은 남산신성비

신라 591년 /경주 남산 식혜골과 일성왕릉 주변 출토

 

남산신성은 경주 남산 북쪽 산허리, 해목령을 중심으로 여러 골짜기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입니다.

남산신성비는 1934년 발견을 시작으로 2000년까지 총 10개의 비석이 발견되었습니다.

 

 

 

 

단양신라적성비(국보 198호)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출토

여기 전시된 것은 복제품입니다.

 

 

 

 

이차돈 순교비(앞면과 뒷면의 모습)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 출토 /통일신라 817년

 

신라의 불교 공인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차돈입니다.

그의 목을 베자 젖이 한길이나 솟고, 그 머리는 금강산(소금강산)에 떨어졌으며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헌덕왕 9년 817년에 그의 행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 비석이 바로 백률사(그의 머리가 떨어진 곳에 세운 절)에 있던 이차돈 순교비입니다.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극적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사천왕사 비

경주 사천왕사 출토/ 통일신라 7세기 후반

 

 

쇠와 돌에 새겨놓은 글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고대의 시간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미술관의 위층..

금석문실과 황룡사실은 이리 널찍하여

관람하기에 참 좋습니다.

 

 

 

 

이제 미술관의 마지막 실인 황룡사실 입니다.

 

황룡사 터에서 나온 문화재를 전시한 곳으로

황룡사 망새를 비롯하여 목탑 터에서 나온 사리갖춤, 지진구, 여러 종류의 기와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황룡사는 국립경주박물관 북쪽에 옛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진흥왕 14년 553년 짓기 시작하여 선덕여왕 때인 645년에 완성된

신라에서 으뜸가는 절이었던 황룡사..

 

진흥왕 때 새로운 궁궐을 월성 동쪽에 지으려 하였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을 짓고 황룡사라고 하였습니다.

 

황룡사에는 신라의 보물 가운데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금당에 안치한 금동장륵존상과 구층목탑입니다.

 

높이가 무려 480cm 정도 되었다는 금동불,

현재 남아 있었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금동불이 되었겠지요.

황룡사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항룡사는 고려시대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고려 고종 25년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진은 황룡사터의 전경과 황룡사의 모습을 짐작하여 만든 미니어쳐

 

 

 

 

망새

신라 7세기/황룡사 터 출토

 

이 기와는 용마루 끝에 올려지는 것으로 흔히 '치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목조건물의 가장 무서운 적은 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의 상징 중의 하나인 용을 두었습니다.

즉 용마루 끝에 달린 이 기와는 용의 상징물로 여겨집니다.

 

이 망새는 황룡사 강당 터 근처에서 발견된 조각들을 복원한 것인데

그 높이가 무려 182cm에 이릅니다.

 

 

 

 

옆면과 뒷면에는 연꽃무늬와 얼굴무늬를 별도로 만들어 붙였는데

얼굴무늬에는 수염을 새긴 것도 있어 남녀를 구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은 망새의 뒷면의 모습입니다.

 

 

 

 

황룡사터 목탑 사리갖춤(사리장엄구)

구층 목탑 심초석 사리공내 출토/신라 646-고려1438년

 

금합과 은합 그리고 구슬

 

 

 

 

사리함, 은합

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 사리공 내 출토/통일신라 8-9세기

 

 

 

 

청동 합과 청동 완 그리고 백자 항아리

구층목탑 심초석 아래 출토

 

 

 

 

황룡사 지진구

구층목탑 심초석 아래 출토/신라 646년

 

지진구는 큰 건물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땅에 묻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보통 금,은 수정 진주 호박 유리 마노 등 칠보 외에 거울 칼 등을 묻었습니다.

황룡사에서는 목탑 터와 금당 터에서 지진구가 나왔습니다.

 

 

 

 

황룡사에서 나온 기와와 전

 

황룡사에서 나온 4만 여점의 출토품 가운데 3만 여점이 기와인데

그 종류뿐만 아니라 만든 시기도 매우 다양합니다.

신라 진흥왕 14년인 553년부터 고려 고종 25년 1238년 불탈 때까지

여러차례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꽃무늬 수막새

7세기 전반

 

 

 

 

구름무늬 사까래 기와, 연꽃무늬 서까래 기와, 구름무늬 부연기와

10-13세기

 

 

 

 

용얼굴 무늬 기와(용면와)

통일신라 8세기

 

 

 

 

용얼굴무늬 암막새(용면, 평와당)

고려 10-13세기 전반

 

 

 

 

연꽃무늬 사래기와

신라 7세기 전반

 

네모난 연꽃무늬 사래기와는 삼국시대 기와 가운데에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던 것입니다.

 

분황사 바로 위쪽의 황룡사터는 둘러보는데만도 한참이지요.

그만큼 넓었던 곳이지요.

 

그곳이 남아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생각..

어쩐지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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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여기 올린 대부분의 설명은

경주박물관 내의 안내도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찾아가는 길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18

 

경주IC → 경부고속도로 이후 약 5분 소요(3.81Km) → 우측방향(62m) → 문천길(우회전)39m → 문천길(좌회전)638m → 일정로(우회전)38.5m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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