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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공연

청포도의 작가 이육사 문학관이 안동에 있었네?

 

 

요즈음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어디를 가면 그 고장의 관광안내 팜플릿을 먼저 구하는 겁니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안내서를 받고 어디를 갈건지 고민하는 일..

이 일도 여행중의 행복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안내서를 보니, 도산서원 근처에 이육사 문학관이 있습니다.

도산서원을 가기로 한 터라, 조금만 서두르면 다녀올 수 있을 듯 합니다.

도산서원에서 차로 6km 정도..

이육사 문학관의 정경입니다.(2010년 9월 4일)

 

 

 

문학관을 들어서면 맨 처음 우리를 반기는 이는 이육사 선생의 흉상~

안녕하세요? 선생님! 하고 배꼽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아래쪽의 손대지 마세요란 문구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2층 높이의 벽에는 이육사 선생의 대표시 청포도가 걸려있고, 가족들의 사진과 출판되었던 책들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1층은 이렇게 위로 트인 한쪽 벽과 공간을 반쯤 갖고 있고, 나머지 절반에는 전시실이 꾸며져 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안내하시는 분이 지금 2층에서 이육사선생에 대한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으니 이층 강당으로 먼저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바쁘게 서두르시며 2층으로 안내를 하십니다.

영상물을 다보고나니, 2층에도 조그만 전시실이 있습니다.

2층 전시실에는 주로 이육사 선생과 관련된 문인들에 관한 전시입니다.

 

 

 

 

이육사 선생과 관련된 서적이 전시되어 있네요.

 

 

 

 

1층 전시실은 육사의 생애와 문학세계, 독립운동의 자취를 볼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이육사

 

그는 1904년에 태어나 1944년 1월 16일 민족의 해방을 못보고 눈을 감습니다.

호는 육사, 본명은 원록, 작명은 활活  출생은 경북 안동.

그의 고향이 이곳 안동이었군요.

 

그는 조부 치헌 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었했습니다.

1921년 결혼, 백학학원에서 수학하고 9개월간 교편을 잡습니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유학했다가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귀국 대구에서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문화활동을 별였다고 합니다.

1926년 중국 북경 등지에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가 조직활동을 하다

1927년 여름 조재만과 동행해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릅니다.

그 때의 수인번호 이육사二六四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로 짓습니다.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첫 시 <말>을 발표했고 이후 총 39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이듬해 북경과 남경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의열단에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해 6개월 과정을 마칩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

이듬해 1월 16일 마흔의 나이로 북경 주재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생을 마칩니다.

 

 

 

 

조선혁명군사 정치학교 간부 시절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육사는 1927년 '장진흥 의거'에 연루되어 처음 구금된 이후 1944년 북경에서 순국하기까지 총 17번의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숱한 옥고로 인해 폐병에 걸려 약해진 몸은 매서운 감방 생활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1944년 숨을 거두고 맙니다.

함께 갇혀 있던 여성 항일투쟁가 이병희의 감방에서도 육사가 기침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고 하지요.

먼저 풀려난 이병희는 육사의 사망소식을 듣고 시신을 받아 화장했다고 합니다.

이후 육사의 동생 원창이 북경으로 와 유골을 인계받아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습니다.

 

 

 

 

이육사와 시대를 함께했던 문학가들..

 

 

 

 

육사의 대표시와 친필 원고,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시집 초판본

 

 

 

 

육사의 친필

 

 

 

 

이육사가 신석초에게 보낸 편지와 친필

 

 

 

 

이육사의 수감 모습(서대문 형무소)

 

 

 

 

이육사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광야가 걸려 있습니다.

요즈음은 어떨련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이육사의 청포도와 광야가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지요.

 

이 작품 아래 덧붙인 말을 옮겨 보자면..

 

이 작품은 꽃과 함께 이육사의 유작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1945년 12월 7일 <자유신문>을 통해서 활자화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꼬리에서 시인의 아우 이원조는 <지원극통>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절정과 함께 이육사의 항일 저항 정신이 바닥에 깔린 작품입니다.

여기서 백마타고 오는 초인은 민족해방의 상징입니다.

전편에서 역사를 의식한 시인의 목소리가 고조된 가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육사의 안경

바라보자니 어쩐지 마음이 찡해집니다.

 

 

 

 

이육사의 사진과 어머니 사진.

형제들 사진..

 

 

 

 

육사의 시집

 

초기 작품에서 이육사는 침울한 정신세계를 추상적인 말로 노래했다고 하지요.

<황혼> <교목> <호수>등이 있습니다.

중기에 접어들면서 육사의 시는 인간과 세계의 여러 현상에 관심의 손길이 뻗쳐 지는 것으로 변모됩니다.

일제 암흑기의 막바지에 이으러 반제, 저항의 의지를 담은 것이 되었습니다.

<절정> <광야> <꽃>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죽남유고

육사는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지요. 

한문으로 쓴 글입니다. 

 

이육사는 시 뿐만 아니라 소설, 수필, 평론 등 문학의 전 양식에 걸친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육사가 1934년부터 발표한 수필은 1942년까지 총 15편으로, 밀도 높은 정서를 보여주고 있으며, 

사회비평 8평을 비롯해 문예비평 8편을 내놓아 뚜렷한 사회의식을 드러냈습니다. 

 

안동을 가신다면, 이육사 문학관... 

빼놓지말고 둘러보심이 어떠하신지... 

 

 

이육사 문학관 찾아 가는 길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900

 

찾아 가는 길

 

중앙고속도로 서안동 ic --톨게이트 지나 우회전하여 9.4km를 직진 --태화삼거리에서 화랑로 안동역 방면으로 10시방향 좌회전

--천리고가교 북단에서 퇴계로 시청방면으로 좌회전 1.7km-- 퇴계로 2시 방향으로 좌회전 4.5km --퇴계로 좌측도로 12.8km 직진

--검문소 삼거리에서 퇴계로 도산서원 방면으로 좌측도로 -- 이곳에서부터는 도산서원 이정표 잘 되어 있습니다.

--도산서원 이정표 따라 가다 도산서원 앞에서 이육사 문학관 이정표나 퇴계 종택 이정표 보고 가시면 됩니다.

--도산서원에서 6-7km 정도이니 차로 5분 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