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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궁에 자리한 숲-경기전

 

 2010년 5월 13일. 이곳은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태종 10년(1410)에 창건된 경기전 입니다.

몇 백년도 더 늙었다는 나무 둥치들이 곳곳에 서 있어 좋습니다.

경기전의 정문 앞에도 아름드리 나무가 푸르름을 뽐내고 서 있습니다.  

 경기전 정문 앞에 하마비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이 비 앞으로 지나갈 때에는 누구든지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비석입니다.

왕, 장군 또는 벼슬이 높은 유명한 성인들의 태생지나 사당 앞에 세웠으며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말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이곳 경기전은 조선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이이기에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고 아무나 출입하지 말라는 뜻으로 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이라 새긴 하마비를 1614년 세웠으며 1856년에 중각하였습니다.

 

 어진을 모신 본전으로 들어서기 전에 세워진 홍살문과 아름드리 나무들의 모습입니다.

 경기전은 입구로 들어서면 정면으로는 본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수복청, 경덕헌, 서재, 동재, 전사청등 제사를 모시고 관리하는 데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편에는 예종대왕 태실비와 숲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른편부터 돌아보기로 합니다.

경덕헌의 모습입니다.

 가까이 가봅니다.

이 곳은 경기전을 지키는 수문장이 일을 맡아보는 곳입니다.

경덕헌에 뒤로 돌아보니, 이곳의 출입문과 전동 성당의 모습이 보입니다.

문을 지나면, 다시 중문이 자리하고 있구요.

살림집의 안채와 비슷한 모습으로 수복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수복청은 경기전의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낮은 직급의 벼슬아치들이 있던 곳입니다.

주로 큰 일이 있을 때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일정기간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었습니다.

<세조실록> 세조 8년 8월 6일조에 의하면 전주 경기전에 수복의 수가 관노 1명, 양민 18명이 교대로 지켰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를 미루아 볼 때 수복청에는 항상 몇 명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가 있습니다.

   

 마청과 서재의 모습입니다.

 서재와 나란히 서 있는 동재의 모습입니다.

이 곳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어진 집으로 재각이라고 하며, 제향(제사)을 맡은 관원들의 재계의식을 하기 위한 곳입니다.

재계의식은 제사를 임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 신을 맞을 준비를 하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어정입니다.

어정은 임금의 음식을 만들거나 임금이 마실 물을 길으는 우물을 말합니다.

그리고 종묘, 사직단(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토신인 사와 곡신인 직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등에서 임금이 참여하는 제례에 사용하는 우물도 어정이라고 합니다.

어정의 모습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셨던 경주의 집경전, 평양의 영숭전, 전주의 경기전 우물도 어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정은 깨끗하고 성스럽게 취급해야 하므로 주위에 담을 두르고 문을 설치해두기도 하였습니다.

 전사청과 조병청의 모습입니다.

전사청은 국가의 제사에 쓸 제수 준비와 제사상을 차리는 일을 담당하는 전사관(나라의 제사를 맡아보는 벼슬아치)이 사무를 행하면서 제사 준비를 하는 곳입니다.

                                                  

 

 이제 본전으로 들어가 봅니다.

 이곳에는 태조의 어진 뿐 아니라, 다른 왕들의 어진도 모셔져 있습니다.

본전의 오른편에 정조, 고종의 어진이 모셔져 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본전에는 태조 이성계를 그린 초상화인 어진을 모신 곳입니다.

경주 평양 등지에 모셔던 어진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버리고, 전주 경기전의 어진만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남아 있는 어진은 고종 9년(1872)에 기존의 낡은 어진을 태워 묻고, 서울 영희전에 있던 태조의 어진을 본떠 새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람들~

 이제 본전에서 오른편으로 향합니다. 문을 나서자 대숲에 살랑이는 바람소리.. 아름드리 나무에서 만들어주는 넉넉한 그늘이 자리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예종대왕 태실 및 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태실은 조선 예종대왕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넣어 둔 석실이라고 합니다.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보관하였는데, 이를 태실이라고 합니다.

원래 선조 11년(1578)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세웠다가 영조 10년(1734) 다시 고쳐 세웠습니다.

1928년 일본의 조선 총독부가 태항아리를 가져 가면서 파괴되어 구이 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것을 1970년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합니다.

이 태실은 팔각형 돌 난간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돌을 얹은 다음 지붕돌로 덮었습니다.

비석은 태실과 함께 옮긴 것으로, 예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글과 비석의 건립연대를 앞면과 뒷면에 각각 새겼는데, 건립연대는 선조 11년(1578)입니다.

잘 보존된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뿔 없는 용의 모습을 새긴 머릿돌이 돋보이는 비석입니다.

  그리고 그 뒤편에 자리한 전주사고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을 기록하였으며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실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봉안하여 왔었습니다.

조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태종9)부터 1413년(태종130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1426년(세종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년(세종13)에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 정종, 태종의 3조 실록 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 춘추관과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습니다.

그러나 2부는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27)에 다시 2부를 등사하여 전주, 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분장하였습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춘추관, 충주, 성주의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방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손홍록, 안의 등이 실록은 내장산 용굴암에 이안, 사수하였기 때문입니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권, 614책 47궤, 기타 전적이 64종 556챗 15궤가 봉안 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국보 제 151호)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뒤쪽으로는 조경묘와 유물 전시관이 더 있지만, 모습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담장 아래 놓인 벤치에 앉아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에 고요가 깃드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