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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장보고가 꿈꾸었던 해상왕국의 본영-장도 청해진 유적지

 

 2010년 4월 30일. 완도의 장도 청해진 유적지의 모습입니다.

 

 장도의 모습..

원래 다리가 놓여있지 않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던 곳이랍니다.

청산도행 여객터미널을 가다가 우연히 본 곳인데, 눈에 띄입니다.

장도 청해진 유적은 총면적 482,284m²이고 이곳 장도의 해발고도 43.5m로 청해진의 중요시설물이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멀리 북, 서쪽은 강진만과 해남 이진의 길목이고, 동쪽은 고금, 약산도를 경유 득량만과 고흥반도로 그리고 남쪽으로는 청산도를 지나 대양으로 중국과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입니다,

1991년부터 2000년까지 국립문화재 연구소의 유물발굴조사를 통하여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2001년부터 복원정비되었다고 합니다

 다리를 건너 유적지로 들어서면 맨 처음 볼 수 있는 외성문의 모습

 외성문 사이로 바라본 청해진 유적지의 모습..

외성문에서 바라본 청해진 유적지의 모습

 조금 걸어 올라가면 만나는 내성문

섬의 고대에서 서남치 방향으로 향해있는 내성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습니다.

내성문은 적으로부터 외성이 함락되면 또 하나의 방어책으로 성 내부에 쌓는 성의 두 번째 출입문을 말합니다.

청해진 내성문은 외성문에 비해 높은 곳에 위치해 서쪽 관망과 치휘가 유리한 지형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는 성문과 함께 지휘소 역할을 하였을 문루가 같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토성에 올라 본 외성문과 바다..

 섬 둘레를 따라 이렇게 토성이 쌓여 있습니다.

장보고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새삼 궁금해지지요?

사실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언제 당으로 건너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청해진은 당에서 귀국한 장보고가 서남해안에 출몰하던 당의 해적활동을 근절시킬 목적으로 흥덕왕에게 청해에 군사를 주둔시킬 것을 주청하여  설치했다.

당시 청해진에 배치된 1만 명의 군사는 장보고 개인이 모집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는 장보고의 직함이 다른 군진의 책임자와는 달리 '대사'(大使)라는 특별한 칭호였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청해진을 근거지로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에는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를 보내는 등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했다.

일본의 승려 엔닌[円仁: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최훈(崔薰)이라는 인물이 청해진 병마사(兵馬使)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청해진은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에 위치한 일종의 해상왕국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축적된 부와 군사력을 배경으로 장보고는 중앙정부의 권력전에도 관여하여 왕위계승전에 패한 김우징(金祐徵)과 김양(金陽)을 받아들인 뒤 지원군을 보내어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딸을 문성왕의 차비(次妃)로 들이려고 한 시도가 진골귀족의 반대로 무산되자 그는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가, 846년(신무왕 8) 중앙정부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당했다.

그뒤 이창진(李昌珍) 등의 잔여세력에 의해 일본에 무역선을 보내는 등 활동을 계속했으나 851년에 청해진을 파하고 그 주민을 벽골군(碧骨郡:지금의 김제)으로 이주시키면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청해진이 설치된 곳은 완도 본도에서 170m 정도 떨어진 장도(將島)인데 섬 둘레를 외성과 내성으로 축성한 흔적과 경사가 완만한 섬의 남서쪽에는 목책(木冊)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사적 제308호 '장도청해진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

 

장도에서 바라보는 완도대교의 모습..

그 시절의 꿈은 사라지고.. 사람도 사라지고..

그러나 바다는 여전히 푸르르고.. 섬을 지나 흐릅니다.

장도를 한바퀴 돌아보고 나오는 길..

물 빠진 갯펄 위로 지난 기억들의 시간이 흐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