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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선덕여왕의 모습을 한 남산 부처골 감실부처와 선덕여왕릉

 

 경주 능지탑지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선덕여왕릉이 있습니다. 이 능은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김덕만)이 모셔진 곳입니다.

낭산의 남쪽 능선 중턱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번 경주 여행에서 선덕여왕과 관련된 한 곳을 더 다녀왔습니다. 바로 경주 남산 부처골 감실부처입니다.

정확한 명칭은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입니다.

다음 날 다녀온 곳인데, 선덕여왕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 함께 올려봅니다.

 신라 선덕여왕릉을 오르는 길..

비오는 솔숲에 가보신 적이 있으세요?

바닥은 오래된 마른 가지가 깔려 있고, 내리는 비는 솔숲의 향기를 더욱 낮게 바닥에 깔리게 해줍니다. 이 소나무 숲길을 오르면 선덕여왕릉을 만날 수 있습니다.

 소나무 숲에 둘러쌓인 선덕여왕릉

밑굴레 74m, 높이 6.8m, 지름 24m 되는 이 능의 겉모양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단의 자연석 석축이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입니다. 진평왕에게는 두 딸만 있을 뿐 아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화백회의에서 논의 끝에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그녀는 여왕에 오른 후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건립하였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습니다.

또 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능을 향해 뻗어가는 소나무의 뿌리들.

소나무들이 능을 향해 줄기와 뿌리를 뻗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왕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하였다. 그날에 이르니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났는데, 여러 신하들이 낭산 양지에 장사 지냈다. 10여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처음 건립하였다.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사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조금 보충하자면, 선덕여왕이 죽고, 신하들은 그녀를 이곳 낭산의 남쪽 기슭에 묻었습니다.

그 뒤 문무왕 때,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후, 당나라는 신라마저 삼키려 합니다.

평양에 머물던 50만 대군이 당나라군이 육로와 바닷길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왕은 신력이 출중한 월명사에게 자문을 구하게 됩니다.

월명사는 제망매가라는 향가를 지으신 분이지요. 그는 왕에 이르기를, 낭산 밑에 사천왕사를 짓고 정성으로 빌면 당군을 막을 수 있겠다고 합니다.

그의 말대로 문무왕은 낭산 밑에 사천왕사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낭산 밑에 사천왕사가 들어서고 보니 사천왕사 뒷산 기슭의 선덕여와의 무덤자리가 자연스럽게 도리천에 해당하게 됩니다.

참으로 영명한 선덕여왕입니다. 자신의 무덤자리가 도리천이 될 것임을 내다본 것입니다.

 

이번에는 사천왕사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쉽게도 보수 중이라고 하네요.

 선덕여왕릉을 겹겹이 둘러싼 소나무 숲.

경주의 산들은 소나무가 많은 듯 합니다. 경주 남산에서도 소나무를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선덕여왕릉의 뒷면

 이곳은 다음 날 오른 남산 부처골 감실부처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푸르른 대나무 사이를 지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기대하게 됩니다^^

 이 불상은 경주 남산 동쪽 기슭 한 바위에 자연암을 0.9m나 파내어 감실을 만든 후 조각한 여래좌상입니다.

경주에서는 <할매부처>로 불리운다고 합니다.

 한 눈에 보기에는 그저 푸근한 여인으로 모습입니다. 이 여인의 모습이 생전의 선덕여왕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신라인들의 선덕여왕에 대한 애정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머리부분은 깊은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고, 두건을 덮어쓴 것 같은데, 귀 부분까지 덮여 있습니다.

얼굴은 약간 숙여져 있으며, 둥글둥글하게 조각하고 눈은 은행알처럼 두툼하게 나타내었습니다.

어깨는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고 옷은 양 어깨에 걸친 통견으로 하였습니다.

손은 옷 속에 넣어 표현되지 않았고 옷이 수직으로 흘러내려 사각형 대좌를 덮고 있습니다.

오른발만을 밖으로 드러내어 부자연스럽게 표현하였습니다. 대좌를 덮은 옷은 아랫단이 장막을 만들어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른발의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이 불상은 장창골 애기부처와 배리 삼존불과 함께 신라석불로는 아주 이른 시기인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불상으로 인하여 계곡 이름을 부처 골짜기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남산에 수많은 부처들이 있지만, 남산의 동쪽 기슭에 아침 여명을 받아 빛나도록 조성된 이 감실부처는 그 뜻이 사뭇 다릅니다.

감실부처는 서방정토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라 경주에 매일 뜨는 여명을 맞이하는 따스하고 지혜로운 여인의 모습입니다.

죽은 뒤에 가는 서방정토가 아니라 현생의 여명을 맞이하는 감실부처의 모습인 것입니다. 마치 석굴암이 여명의 빛을 맞도록 조성된 것처럼 말입니다.

신라 호국불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보아야겠습니다.   (바람이 꽃이 되어란 카페에 실린, 서정록 선생님의 글 중에서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