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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인 제매정, 그리고 천관사지

 

 경주 반월성에서 서쪽으로 400미터 쯤 되는 곳에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가 있습니다.

바로 반월성 옆을 흐르는 남천 옆입니다. 지금 그곳에는 우물과 집터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우물 이름이 <재매정>이라고 합니다. '재물을 사는 우물'이라는 뜻이지요. 우물을 퍼내면 퍼낼 수록 집안에 재물이 모이는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 값대로 김유신 장군의 집안의 신라최고의 명문가가 되지요.

 

꽤 넓은 집터가 남아 있습니다. 

 유허비각과 우물

<재매정>

 삼국사기에 김유신 장군이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돌아오는 중에 백제군이 다시 침범하여 온다는 급보를 받습니다.

장군이 쉴 사이도 없이 출전하는 길에 자기 집 앞을 지나게 되자, 병사를 시켜 물을 떠오게 하여 마신 다음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 하면서 떠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물은 깊이 5.7m, 최대 지름 1.8m, 바닥 지름은 1.2m 내외이고, 판석이 덮여 있습니다.

옆에는 조선 고종 9년에 세운 유허비가 있습니다.  

  

 우물 옆에도 터가 남아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실린 내용을 그림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김유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이 몇 곳 남아 있습니다. 그의 무덤도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하지요. 천관사지도 그와 관련된 유적 중의 하나입니다.

 

이 절터는 도당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신라시대 김유신이 사랑하던 기생 천관의 집을 절로 바꾼 곳이라 전합니다.

김유신은 어머니 만명부인의 엄한 훈계를 명심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지 않았지만, 하루는 우연히 기생 천관의 집에 유숙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훈계를 들은 뒤 천관의 집에 들르지 않았습니다.

그 후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말이 이전에 다니던 길을 따라 천관의 집에 으르렀습니다.

김유신이 잘못을 깨닫고 타고 갔던 말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돌아갑니다.

훗날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 한 뒤 사랑하였던 옛 여인을 위하여 천관의 집터에 절을 세우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건립 이후 이 절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중기 이공승이 이 절을 지나면서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00년 국립 경주 문화재 연구소에 의하여 발굴조사 되었습니다.

- 여기까지가 안내문에 씌여진 내용입니다-

 

하지만...

저희를 함께 가신 서정록 선생님깨서는 천관은 기생이 아니라, 신녀였다고 하십니다.

우선 그녀의 천관이란 이름이 하늘에 올리는 제사와 관련이 있는 직책인데다가, 그녀의 집 주변에 박혁거세가 묻힌 오릉이나 명문대가의 집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생집이 그런 곳에 있기는 어렵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조선시대와 같은 기생이라는 제도도 없었고, 그저 유녀라고 해서 떠돌아다니며 몸을 파는 여인들이 있었을 뿐이랍니다.

 기단의 모양이 독특합니다.

 천관사지를 알리는 안내판과 천관사지터

얼핏 보면 근처의 논밭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나온 유물들은 근처의 학교 마당으로 옮겨졌다고 하네요.

 바닥에 기와파편들이 보입니다. 빗살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된 것일까요?  고려 중기까지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니, 고려 중기의 기와일까요?  궁금증이 커집니다.

 바닥의 기와들을 모아보니, 금방 한무더기가 됩니다.

쓸쓸한 비오는 천관사지를 뒤로 하고 나옵니다.

 차를 주차하여 둔 사마소 앞입니다.

사마소는 재매정 바로 옆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사마소는 조선시대의 과거에 합격한 그 지방의 생원과 진사들이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토론하던 건물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자기 수양을 위해 이 곳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연산군 때에는 생원, 진사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백성에게 양식을 빌려주기도 하였다는 곳입니다

처음 세워진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뒤로 영조 17년에 다시 지어 풍영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옆면의 사마소라는 현판은 영조 38년 당시의 부윤 홍양한이 쓴 것이라고 합니다.

이 건물은 원래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300m 거리에 있는 신라시대 월정교터의 북쪽 교대 위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8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문이 잠겨 있어, 아쉽지만 바깥에서 보는 걸로 만족해야겠네요.

 

비는 더 내리고.. 이제 어디로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