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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 최부잣집의 가양주인 경주 교동법주와 최완 선생 생가

 

 최부자댁 바로 옆에는 경주 법주를 만드는 곳이 있습니다.

법주는 경주 교동 최부자댁에 전해 오는 비주로 조선 숙종 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하던 관직에 있던 최국선이 고향으로 내려와 최초로 빚은 것으로 궁중에서 유래된 술입니다.  술빚기는 9-4월까지가 적기이고 연중 보관이 가능합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경주법주 제조장의 안채- 정갈한 한옥의 기품이 술에도 배여 있을 듯 느껴집니다.

 대문 옆에 경주 법주라고 세워진 안내판이 아니라면, 교동의 일반 한옥과 별 구분이 없어보입니다.

술은 그 재료인 물이 중요한데. 이 법주는 최씨댁 마당의 우물물을 써서 만든다고 합니다.

원료는 밑술로 밀누룩과 찹쌀을 쓰고, 덧술로 찹쌀밥을 넣어 빚는데 100여 일간을 숙성시킨다고 합니다.

숙성된 법주는 외관이 밝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며 특유의 향기와 감미에 약간의 산미를 내는 부드러운 술입니다.

현재 이 술의 기능 보유자는 배영신씨라고 합니다. 

 법주를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고 싶은데, 그럴수가 없다고 합니다. 아쉽지만, 사진으로 대신하여야 할 듯...

가운데 계신 분이 배영신님이신 듯..

 아쉬워서 뒤 돌아 보는 길..

세월의 손때 묻은 대문이 반쯤 열린채 절 배웅해줍니다.

 법주 제조장 옆으로 가니, 긴 돌담길이 나옵니다.

갑자기 '콩콩' 뛰고 싶어지는 길입니다. ㅎ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소꼽장난이라고 하고 있을 듯 한 길...  술래잡기라도 하고 있을 듯 한 길입니다.

이길의 중간 쯤에 독립유공자 최완 선생 생가가 위치해 있습니다.

최완 선생은(1889-1927년)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으며, 독립운동가 최준 선생의 아우입니다.

1909년 안희제, 이원식, 윤병호, 서상일 등 80여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신민회 계열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0년 8월에 일제에 의해 강제조약이 실행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고 합니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그해 4월 13일에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재무부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조사원과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그 후 일제에 체포, 압송 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결국 오랜 망명생활 끝에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운명하셨다고 합니다.

 

 어디에나 비나리는 있지요.

오래 살기를 바라고, 재물이 풍성하기를 바라고, 집안이 화목하기를 바라고...

 대문 안을 살짝 들여다 봅니다.

 이 길을 따라 걸어 만나는 기와집이 선생의 생가가 아닐까 싶네요. 세월에 따라 덧대어지고, 만들어진 집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교동의 골목은 이렇게 돌담과 기와집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아이들이 뛰어놀았을 골목은 텅 비어 있고, 때로는 사람들이 나직하게 말하며 이 집들과 함께 하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빈 집으로 자물쇠를 채워놓기도 하였습니다.

 봄이 되어 꽃이 피고, 푸르른 잎이 오를때면, 저 담너머로 어떤 꽃이 얼굴을 내밀까요?

 교촌을 돌아나오니, 입구에 교촌을 알리는 표지석이 인사를 합니다.

'이곳은 교촌입니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