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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12대 만석군의 철학이 있는 곳-경주 최부자집

 

 2009년 2월 19일부터 22일까지 경주, 울산으로 답사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경주에 도착하고나서 흐리던 하늘은 기어이 빗방울을 날립니다.

경주의 첫 답사지로 경주의 최부자집으로 향합니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으로 불리우는 이곳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경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았으며 문간채, 안채, 사랑채, 사당, 고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하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대 불타서 주춧돌만 남아 있었습니다.  

 1970년대 불타 주춧돌만 남아 있던 사랑채가 최근에 다시 지어졌다고 합니다.

 한때는 사랑채와 행랑채에 묵어가는 식객이 100여명에 이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랑채의 모습과 안채로 들어가는 문

 사랑채의 모습

 

 

 사랑채의 마루

벽면에 세워진 장(?)이 궁금해집니다. 어디에 쓰이는 건지.. 단순한 장인건지...

 부자 3대(富者3代)를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부잣집의 만석군의 전통은 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1600년대 초반에서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12代를 내려오며 만석군의 전통을 이어갔고 마지막으로 1950년에는 전 재산을 스스로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함으로써, 스스로를 역사의 무대 위로 던지고 사라졌습니다. 

300년간 만석군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가훈 때문이 아니었나싶습니다.  

 사랑채에 걸려 있던 육연(자신을 지키는 지침)도 새겨볼만한 말입니다.

 최부자집의 가훈 을 다시 살펴보면,

1 절대 진사(제일 낮은 벼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휘말려 집안이 화를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재산은 1년에 1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릅니다. 1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에 돌려 사회에 환원 했다고 합니다. 
3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냈습니다. 
4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매입하지 말라. ---   흉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싼 값에 내 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합니다.

5 가문의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사방 100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라.

  'ㅡ'자 모양의 대문채

 곳간의 모습입니다.

 'ㅁ'자 모양의 안채.

이곳은 후손들이 살고 있는 듯 합니다.  

 

이곳은 또한 최준 선생 생가이기도 합니다.(대문 앞에 안내문이 있더군요)  

문파 최준(1884-1970) 선생은 이른바 9대 진사 12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로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선생은 영남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특히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렀다고 합니다.  

선생은 또한 이곳 사랑채에 백산 안희제(1885-1943)과 백산상회 건립을 결의하고 대표로 취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 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 밖에 선생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선생 등과 <동경통지> 를 편찬하는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해방 직후 선생은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니, 곧 오늘의 영남대학고 전신입니다.

그리하여 현재 이곳은 영남대학교의 소유라고 합니다.

 사당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있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 특징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그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채 뒤의 후원

 300년 세월 속을 견뎌내온 집...

 사랑채에서 바라본 대문채와 대문의 모습

빗방울이 날리긴 했지만, 고즈넉한 오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