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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기권

외세의 침략에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강화도 초지진

 

 2008.12월 14일. 하늘이 맑은 날입니다. 강화도 장화리 일몰이 멋질 것 같아 집을 나섭니다. 강화도의 초지대교를 지나 맨 처음 만나는 초지진의 모습입니다.

 이곳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년)에 구축한 요새입니다.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고 합니다

                                        

 성벽의 모습

 진의 입구, 진으로 들어가기 위헤 돌담 사이에 난 문을 지나 갑니다.

 진내에 전시된 대포

포구에서 화약과 탄약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서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 장전식화포로 사정거리는 700m이며 조선 영조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포탄 자제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고 합니다.

 진에서 포를 설치하였던 곳.  그 사이로 멀리 초지대교가 보입니다.

1871년(고종(高宗)8) 4월 23일 미국의 로저스 제독(提督)이 지휘하는 극동 함대가 콜로라도호(號)를 비롯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는 군사적 행동을 한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습니다.

모노카시호(號)와 팔로스호(號)등의 함포지원 아래 킴벌레이 중령(中領)이 미국 해병 450명을 이끌고 20척의 작은 배로 상륙전을 감행하자, 이곳 초지진에서는 수비대가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하여 결국 미군에 점령당하였지요.

이때 진내에 있던 군기고(軍器庫)·화약고·진사(鎭舍) 등 군사 시설물은 미군에 의하여 모조리 파괴되었으며,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문의 대포 역시 파괴되거나, 그들에 의하여 강화 해협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양요가 끝나자 다시 원상대로 복구되었다고 합니다.

 성곽에 올라서서 바라본 초지진의 모습

 

1875년에는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하여 파견한 운양호(雲揚號)에 의하여 또 한번 곤욕을 치렀습니다.

같은 해 8월 21일 운요호가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난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함장 이노우에( 정상(井上))가 단정(短艇)을 내려 담수(淡水)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비진 포대에 접근하여 왔습니다.

이에 미군의 침략으로 쓰라린 경험을 하였던 초지진 수비군이 일본 함정을 향하여 포격을 개시하자 운요호는 110mm와 40mm 함포로 포격을 해와 초지진 포대는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지요. 이때 초지진에는 사정거리 70m 정도의 2인치 정도의 대완구가 있었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 뒤 초지진은 폐진(廢鎭)되었고, 시설은 모두 허물어져 돈대(墩臺)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m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대에는 3개소의 포좌(包座)가 있고 총좌(銃座)가 100여개 있습니다.

 

이곳의 노송과 성벽에는 당시의 포탄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니, 혹 이곳에 가시거든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시길...

 진 바깥으로는 갯펄이 펼쳐져 있습니다. 갈대가 어우러진 초지대교.

 좌측에서 바라본 초지진의 모습

 신미양요 당시, 미국은 약 2시간 동안 맹열한 함포사격을 한 후 상륙하였기때문에, 포격으로 폐허가 된 초지돈대의 내부모습을 찍은 사진입니다.

왼쪽 하단 전면에 불량기포 1문이 보이고, 무너져내린 포좌 입구가 연이어져 있습니다. 오른쪽에 파괴되어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건물은 간이화약고로 추정됩니다.

 

강화도에는 이곳 외에도

광성보, 덕진진, 용진진 등이 있어

강화해협을 지키던 곳들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