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은 제1관부터 제7관까지의 전시실을 가지고 있지요. 제1전시실부터 제4전시실까지의 사진을 올려봅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전시물들이 눈에 띕니다.
상아로 만든 휴대용 해시계의 모습입니다. 마치 나침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자세하게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조금 아쉽습니다.
두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조각상- 발해 때 만든 것이라고 하네요.
제4관 (겨례의 함성)에 전시된 조형물이지요. 전에 봤던 기억이 나는 작품 중의 하나입니다. 그만큼 인상이 깊었던 것이겠지요.
제1관 민족 전통관을 들어서면 볼 수 있는 풍경이지요. 높은 천정과 광개토대왕비의 커다란 위상과 뒷면 벽의 백두산 천지 사진이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제1관은 오천년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의 겨례의 문화유산과 국난극복에 관계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
고인돌 -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랍니다.
가로 7.1m,세로 5.5m, 높이 2.6m로 청동기 시대에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청동기시대에는 권력자가 죽으면 마을 사람 모두 동원되어 커다란 고인돌을 만들었다지요. 사람들은 바위가 있는 산으로 가서 무덤의 위쪽 덮개로 쓸 수 있는 돌을 떼어냅니다. 바위결을 따라 난 틈에다 나무를 끼우고 나무에 물을 적시고 나면 시간이 흐르면서 나무가 불어나 바위가 갈라집니다.
통나무 여러 개를 바위 밑에 대고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무덤을 만들 낮은 언덕 위로 끌고 갑니다.
네 면에 고임돌을 놓고 고임돌 위까지 흙을 채운 다음 덮개 돌을 올려 놓고, 흙을 빼내념 고인돌은 완성됩니다.
시신은 덮개 돌 아래 두었는데, 주로 시신이 지면보다 높게 있으면 북방식이며, 낮게 있으면 남방식입니다. 강화도 고인돌은 북방식이며 고임돌 4개중 2개가 없는 상태이지만, 웅장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2000년에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황룡사 축소 모형
황룡사 치미
높이 1.8m, <치미>는 지붕 용마루 양 끝에 세우는 장식이며, 집 안으로 들어오는 악한 기운을 막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치미는 오른쪽과 왼쪽을 날개 모양으로 만들고 그 사이를 구분해 각각 연꽃과 사람 얼굴 문양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 치미는 경주 황룡사 터에서 부서진 상태로 발견 된것을 원형 그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미륵사 모형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동서 길이 178m, 남북길이 182m,(1/30크기로 재현), 백제 무왕 때 만든 곳이지요.
<삼국유사>에는 무왕이 왕비와 함께 길을 지나는데 부처가 나타나자, 그곳에 부처가 있는 불전과 탑을 세워 미륵사라 이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절 가운데 금당 세채를 짓고 그안에 부처를 모셨습니다. 가운데 있는 금당 앞에는 60미터에 이르는 목탑을 쌓았고 동쪽과 서쪽에 있는 금당 앞으로는 석탑을 쌓았습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지금까지 남아서 그 당시 미륵사의 웅장한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궁궐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있으며, 크기는 가로5.7m, 세로 3.3m로 1801-1834년 조선 순조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궁궐도에서는 창경궁과 창덕궁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16폭의 그림이 이어져 하나의 큰 그림을 구성하는데, 궁궐의 건물(전각)부터 나무, 바위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표현되었습니다. 각 건물마다 이름이 표시되어서 일제에 의해 파괴된 창경궁 복원에 유용하게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신석기 시대의 토기들
천전리 바위그림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있는 것으로, 가로 8m,세로2m의 크기로 선사시대-신라시대에 만들어진것이라고 합니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하였지요. 그림을 그려서 생활을 나타냈고, 소망과 믿음을 표현했으며 다음 세대를 가르쳤습니다. 커다란 바위에 그려진 그림은 보다 오랫동안 남을 수 있었기에, 정성을 다해 새겼습니다.
바위에는 동그라미, 파도 같은 무늬와 사슴, 산양 같은 동물 그림들이 있습니다. 바위면을 갈거나 쪼아서 새긴 이 그림들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과 소망을 말해줍니다. 아래 면에 보이는 한자들은 신라시대 산과 강을 찾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수련한 화랑들이 새긴 것이라고 합니다.
천전리 바위그림의 일부분
거북선이 빠질 수 없지요~
거중기
수원 화성 건축 때 사용된 거중기입니다.
거중기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데 사용하던 건축용 기계입니다.
조선 후기에 정약용이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수원성을 쌓기 위해 돌을 옮길 때 사용하였습니다.
금동으로 만든 큰탑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것입니다.
절에 기증하거나 불사에 쓰기 위해 높이 30cm정도의 동 혹은 금동으로 만든 탑입니다.
탑은 현재 2층의 기단, 5층의 탑신부, 그 위의 탑두부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4층과 5층 사이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워 이 부분에서 결실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금속제이기는 하지만 세부에서 당시의 목조건축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합니다.
척화비
여러 종류의 화회탈들
1900년대 초의 서울 종로의 모습
전차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 당시의 사진관의 모습입니다.
천연당 사진관의 모습
1907년 서울에서 개업한 천연당 사진관은 한국사람이 세운 최초의 사진관으로 개업자이자 유명 화가였던 김규진은 사진관 1층에 화실을 두어 고객들이 사진촬영과 함께 명화를 즐길 수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초창기 인쇄기의 모습
조명과 돌이 만들어내는 인상적인 조각품입니다.
명성황후 시해 장면을 창호지 너머로 그림자를 만들어 보여주며, 효과음을 더했네요.
을사늑약 장면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군대를 주둔시킨 뒤 우리 영토 내에서 일본군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적으로 체결하였지요.
전세가 일본에게 기울자 영국과 미국은 일제의 한반도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하고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게 도와주었습니다.
1905년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서 궁성을 포위한 가운데 광무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였지요.
한일협약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1907년 7월 통감 이토히로부미의 강요로 체결된 조약.
전쟁으로 내몰린 한국 청장년들을 보여주기 위한 모형물
중일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는 모자라는 인력을 채우려고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였고 1943년에는 학도지원병제를 실시하여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습니다. 1944년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불과 1년여 동안 20여만 명의 한국 청장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끌고 갔습니다.
제3관인 나라지키기
국채보상운동, 애국 계몽 운동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 전시해놓았습니다.
안중근 의사에 관한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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