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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여행

유배의 땅, 흑산도.. 그곳에 가면 더 고독해진다-흑산도 여행 4

 

 

 

어디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섬에 간다고 하면 왜 가느냐고 한다.

고독해서 간다고 하면 섬은 더 고독할 텐데 한다.

옳은 말이다. 섬에 가면 더 고독하다.

그러나 그 고독이 내게 힘이 된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고독은 힘만 줄 뿐 아니라 나를 슬프게도 하고

나를 가난하게도 하고 나를 어둡게도 한다.

어떤 사람은 고독해서 술을 마시고 어떤 사람은 고독해서 수화기를 든다.

모두 자기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지혜를 짜낸다

하지만 고독은 자유로워야 한다.

훨훨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져야 하고 지도처럼 방향이 명확해야 한다

마음대로 만든 공간을 마음대로 누웠다가 마음대로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이생진 선생님의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고독은 평등하다 중에서/작가정신 1997년

 

홀로 떨어진 깊은 섬..

고독이 힘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

더 고독해지기 위해 섬으로 가신다는 이생진 선생님을 따라 흑산도로 향합니다.

 

멀고 깊은 섬, 흑산도는

이미 백제시대 세 왕자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질만큼

오래전부터 유배의 땅으로 불려온 곳입니다.

 

유배의 땅, 흑산도..

그곳에 가면 더 고독해지는 듯 합니다. (2013년 6월 3일)

 

사진은 흑산도로 유배와서 16년을 살다가

우이도에서 생을 마친 정약전 선생이 살았던 사리마을근처에서 바라본

칠형제 바위의 모습입니다.

 

 

 

 

지난 포스팅에서 흑산도 아가씨 노래의 유래가 적혀있던 나무를 마지막으로 올려놓았었지요.

그 나무가 자리한 곳은 흑산도 심리마을입니다.

 

나무 아래 서 있으면 이런 항구가 평화로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에는 바다가, 뒤로는 흑산도의 산봉우리들이 자리하고 있는

낮은 지붕의 집들이 나란한 심리마을..

 

나무 아래서, 바닷가에서 조금 서성여봅니다.

 

 

 

 

심리마을에서 바라보니 이런 굽이굽이 도로가 바라보이네요

이제 저곳을 향해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구불구불한 고개길이로군요

 

 

 

 

그리고 그 고개 정상에 자리한 흑산도 일주도로 준공기념비..

 

총 25.4km의 일주도로

1984년 공사를 시작한 일주도로는 거의 30년 가까이 걸려

2010년 3월에서야 완공되어었다고 합니다.

 

육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로군요

천사의 섬, 신안이기에 기념비 위에는 천사상이 자리하고 있네요^^

 

 

 

 

기념비가 있는 정상을 지나 다시 구불구불한 구비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갑니다.

이 구비길 아래 해안에 자리하고 있는 저 마을이

정약전 선생이 유배와서 살던 곳이라고 합니다.

 

 

 

 

사리마을

 

1801년 형제는 나란히 남도귀양길에 올랐습니다.

음력 11월 21일 그들은 나주 금성산 아래 율정점(栗亭店) 삼거리주막에서 묵었다고 하지요.

다산이 서른아홉, 약전이 마흔셋. 

약전은 그날 밤 심정을

문 앞에 갈림길이 놓여 있었네. 본래가 한 뿌리에서 태어났지만 흩날려 떨어져간 꽃잎 같다오’라고 하였었지요.

다음 날 형제는 헤어졌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었지요.

그 날 이후 다시는 살아서 만날 수 없었습니다.

 

약용은 나주 영산강∼영암∼누릿재∼성전 삼거리를 거쳐 강진읍내에 도착했고

약전은 무안 다경진을 거쳐 우이도(목포 서남쪽 51.3km)에 자리를 잡았다가

나중에 흑산도(목포 서남쪽 92.7km)로 들어왔습니다. 

 

 

 

 

마을은 입구부터 약초 말린 것, 약초 캐시는 마을 어르신을 만나볼 수 있는 곳으로

약초가 많이 나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솟대 끝에 물고기가 매달려 있습니다.

육지의 솟대와는 또 다른 모습이로군요

 

 

 

 

낮은 지붕 위에는 한낮의 햇살아래 마늘이 말려지고..

 

 

 

 

낮은 돌담 너머로는 붉은 지붕, 파란 지붕의 집들이 자리하고 있는 곳입니다.

 

 

 

 

텃밭에 앉아 약초를 다듬고 계시는 마을 어르신

 

 

 

 

밭에서 강활을 캐고 계신 어르신,

이곳에서는 약초가 많이 난다고 하시네요.

 

 

 

 

마을 중간즈음에 본향안치, 절도안치, 위리안치 라고 적힌 안내도 뒤로 집들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이곳은 본향안치..

본인의 고향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가벼운 죄인의 안치라고 하네요

 

 

 

 

절도안치

유배지에서 거주의 제한을 가한 유배형벌로 왕족이나 고위관리들에게 적용한 형벌이라고 합니다.

유배지에서도 거주지를 강제로 제한하였기에 두문불출이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위리안치는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가 많은 전라도 연해의 섬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조금 더 오르자 천주교 공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공소 뒤로는 정약전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사둔서당이 바라보입니다.

 

 

 

 

1950년대 지은 공소는 해안몽돌을 주워다가 기둥없이 쌓아 올렸다고 합니다.

 

 

 

공소 앞에는 성모님상이 공소를 마주보며 서 계시는 곳입니다.

 

 


   

그리고 사둔서당

정약전 선생은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하지요.

사귐에 양반 상민 천민이 따로 없었으며 어부는 물론이고 천한 사람들과도 거리낌 없이 술잔을 나눴다고 합니다.

 

양반이라고 전혀 티를 내지 않았으며

글 쓸 게 있으면 주저 않고 대신 써줬다고 합니다.

섬사람들은 너도나도 서로 자기 집에 모시려고 다투기까지 할 정도였다고 하지요.


 

 

 

1801년 우이도에 자리를 잡은 정약전 선생은

1807년 거처를 흑산도 모래미(사리·沙里) 마을로 옮겼습니다.

 

당시 흑산도 인구는 1000명(현 4600여 명)이 채 안 됐다고 합니다.

모래미는 읍동(현 진리) 다음 큰 곳으로, 고기가 잘 잡혀 부자동네였습니다.

 

그는 마을 위쪽 모래언덕에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모래언덕서당(사둔서당)인 복성재(復性齋) 입니다.

 ‘복성(復性)’은 ‘사람 됨됨이를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사둔서당 현판글씨'는 정약용 선생의 글씨라고 합니다.

 

 

 

 

사둔서당에서 바라본 사리마을 풍경..

 

 

 

 

사리마을 앞쪽에 자리한 바다를 보며

다시 내려오는 길

 

 

 

 

유배문화공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약전 선생은 흑산도에서 장창대(1792∼?)라는 소년을 만났습니다.

그는 읍동 앞바다의 대둔도라는 외딴 섬에서 살고 있었는데, 두문불출하고 책만 읽었다고 합니다.

생각이 깊고, 보고 들은 것을 꼼꼼하게 관찰했으며 새 초목 물고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지요.

정약전 선생은 그의 도움을 받아 자산어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1813년 정약전 선생은 ‘동생이 곧 유배가 풀릴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는 육지에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우이도로 다시 나가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모래미 사람들이 한사코 막았다고 하지요

이미 약전은 섬 처자와의 사이에 두 아들(학소, 학매)을 두고 있는 처지였기도 하였습니다


1814년 약전은 가족을 데리고, 한밤중 우이도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돌아왔다고 합니다.

결국 1년 가까이 설득한 끝에, 1815년에야 우이도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동생을 보지 못하고 1816년 6월 6일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형이 죽은 2년 뒤인 1818년 9월 귀양에서 풀려났습니다.

 

참 안타까운 사연들 곳곳에 자리한 흑산도입니다.

 

 

 

 

유배의 땅 흑산도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분, 면암 최익현 선생입니다.

 

1876년 최익현은 병자수호조약 불가 상소를 했다는 이유로

그해 흑산도에 유배 와서 3년 가까이 살았다고 합니다.

 

불과 130여년 전에도 이곳 흑산도는 유배의 땅이었다는..

 

 

 

 

유배문화공원에 자리한 흑산도 유배인 도표~

문헌상으론 고려 의종(재위 1146∼1170) 때 정수개가 처음이며

뱃길 도중 죽는 사람도 흔했다고 합니다.

유배자는 조선시대까지 140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유배자 중엔 임금의 옷을 훔치거나, 스캔들을 일으킨 궁녀 상궁 내시도 있었으며

1762년 사도세자 두둔상소를 냈다는 이유로 흑산도에 위리안치 됐다가 죽은 박치륭(1692∼1766)이나

정약전(1758∼1816), 최익현(1833∼1906) 같은 경우는 정치적 유배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1693년 나인 정숙은 해괴한 짓으로 유배왔다고 되어 있네요.

해괴한 짓은 무얼까? 하고 궁금해 해보는 여행자입니다. ㅎ

 

 

 

 

 

유배문화공원을 지나 마을로 내려가는데

물질을 마치신 해녀분이 마을로 들어서시네요.

 

뒷모습 따라 한동안 서성이다가

 

 

 

 

장미꽃 붉은, 부두민박이란 곳으로 들어서봅니다.

동네 한바퀴 돌아보시고 앉아 계시는 이생진 선생님과 또 다른 여행자

 

 

 

 

이곳에서 직접 담근 약초로 만든 술을 주문하여 한잔씩 마십니다.

이곳에서 나는 약초로 담궜다는데 향기도 좋고 맛도 좋습니다.

 

텃밭에서 가지고 온 상추와 마을 앞에서 딴 미역이 안주의 전부

그래도 안주도 술도 모두 맛있어

술 한병 더 주문하여 먹었답니다^^

 

 

 

 

마을 입구로 내려오니

사리마을 안내돌 옆에 강아지 한마리 서서

지나가는 여행자들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강아지가 여행자를 구경하는 건지

여행자가 강아지를 구경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ㅎㅎ

 

 

 

 

사리마을 포구풍경

저 끝에 서서 낚시하시는 분 살짝 부러운데요

 

 

 

 

그리고 사리마을을 지나 구비길을 오르자마자 다시 전망대

7형제 바위입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 눈에만 7개의 바위가 보이는 곳이니(?)

잘 세어 보십시오.

7개로 보이는지 말입니다. ㅎㅎ

 

사리마을은 흑산도의 정남쪽에 있는 마을로 동남풍이 불어도 어선들이 정박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사리포구 앞에 7개의 작은 섬들이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7형제 바위에는 전설이 있는데

옛날 사리에 홀어머니가 아들 7형제와 바다에 물질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어느 해 큰태풍이 불어와 몇 날 며칠을 어머니가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지 못해

아들 7형제 하나하나가 바다에 들어가 두팔을 벌려 파도를 막아 7개의 작은 섬들로 굳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7개의 섬을 7형제 바위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데 아들들이 바위로 굳어 버린 후에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섬속의 전설은 유독 슬픈 이야기가 참 많다고 생각해보는 여행자입니다.

 

 

 

 

다시 길을 따라 나섭니다.

다시 길을 멈춘 곳은 영산도가 바라보이는 곳입니다.

 

흑산도에서 바라보이는 이곳 영산도와 습지가 있는 대장도

다음 흑산도 여행에서 꼭 가볼 곳으로 찜해놓습니다.

 

 

 

 

이생진 선생님 이곳에서도 스케치에 열중하시더니

이런 그림을 그려놓으셨네요.

 

 

 

 

여행자는 영산도와 해안절벽을 따로 따로 사진에 담고

선생님은 한장의 멋진 그림으로 남겨 놓으셨습니다.

 

 

 

 

다시 일주도로를 따라 달리다 멈춘곳은

천촌리의 면암유적지입니다.

 

홀로 선 소나무 한그루, 그 뒤에 자리한 절벽

 

 

 

 

그 암벽에는 그가 직접 새겼다는 

基封江山 洪武日月(기봉강산 홍무일월)이 남아 있습니다.

‘(고조선의)기자씨가 세운 강산, 홍무(중국 명나라 태조 연호)의 나라’,

즉 우리나라의 무궁함을 뜻하지만, 그 이면에는 뿌리 깊은 사대정신이 흐르고 있는 글입니다.

 

면암은 강화도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곳에 유배됩니다.

그는 처음 포구가 있는 진리에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으나,

나중엔 마을 주민들의 요청에 의해 이곳, 여티미(천촌·淺村)에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그는 흑산도에서 3년가까이 유배되었다가 풀려났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패해 일본으로 압송됐습니다.

그리고 적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 끝에 죽었다고 하지요.

 

 

 

 

천촌리의 면암 유적지를 지나

이제 택시는 처음 출발지였던 예리항을 향해 달립니다.

 

 

 

 

어느곳이 바다인지 하늘인지조차 구별되지 않는

흑산도의 바다를 끼고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말입니다.

 

 

 

 

그리운 바다

 

내가 돈보다 좋아하는 것은

바다

꽃도 바다고 열매도 바다다

나비도 바다고 꿀벌도 바다다

가까운 고향도 바다고

먼 원수도 바다다

내가 그리워 못 견디는 그리움이

모두 바다 되었다

 

끝판에는 나도 바다 되려고

마지막까지 바다에 남아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다가 삼킨 바다

나도 세월이 다 가면

바다가 삼킨 바다로

태어날 거다

 

이생진 선생님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그리운 바다/우리글 2008년

 

 

 

 

그리워 못 견디는 그리움이

모두 바다 되었다고 하시는 선생님과 함께

바다를 보며 달립니다.

 

차는 어느새 예리항에 이르릅니다.

그리고 친절한 기사님, 해넘이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십니다.

 

이쯤되면

다음 이야기가 흑산도의 해넘이임을 눈치채셨을 듯 합니다^^

이어지는 흑산도의 일몰과 별 이야기도 놓치지 않으실거지요?

 

흑산도 찾아가는 길

구분구간운행시간소요시간요금
쾌속선
(남해고속, 동양고속)
흑산도 → 목포 09시 00분
11시 00분
15시 30분
16시 10분
01시간 50분 요금 : 31,300 원
쾌속선
(남해고속, 동양고속)
목포 →흑산도 07시 50분
08시 10분
13시 00분
16시 00분
01시간 50분 요금 : 31,300 원

 

  • ※ 동양고속 (061-243-2111), 남해고속 (061-244-9915)
  • 해상의 기상상태에 따라 소요시간 변동 가능
  • 쾌속선에 차량은 싣지 못하므로 여객선터미널 주변에 주차

 

*가거도나 만재도를 가시려면 목포에서 오전 8시 배를 타야 합니다.

비금도, 도초도, 흑산도, 상태도, 하태도, 만재도를 거쳐 가거도로 갑니다.

 

신안군 문화관광 홈페이지를 들어가면

신안군의 섬여행에 관한 안내가 잘 되어 있더군요

그밖에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클릭해 보세요

http://tour.shinan.go.kr/

 

 

앞선 흑산도 찾아가는 길 포스팅을 아직 보지 못하셨다면 클릭해 보세요

아름다운 서해의 보석 같은 섬을 찾아가는 길-흑산도, 가거도, 만재도 여행 http://blog.daum.net/sunny38/11776551

 

기암괴석과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 흑산도 여행 2  http://blog.daum.net/sunny38/11776553

 

섬에 와 있어도 섬에 가고 싶다-흑산도 여행3  http://blog.daum.net/sunny38/11776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