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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끝나지 않은 제주의 눈물을 이야기하는 곳-제주 4.3평화공원/제주 여행

 

 

 

1948년 한반도의 남쪽 섬 제주도에는 광란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됐다.

 

지난 50년동안 한국 국민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채, '없었던 역사'로 덮어져 왔던 것이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 한(恨)의 역사, 질곡의 세월을 보낸 제주의 아픔...

 

제주 4.3 사건은 그동안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확정과 대통령의 공식사과,

'세계 평화의 섬' 선포 등으로 이어지면서 도민과 유가족 모두 화해와 상생의 길을 모색할 수 있었고

평화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앞으로 제주 4.3평화공원은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접고 화홰와 상생의 터전이자

동북아시대 진정한 평화와 인권의 보루로 자리매김 할 것입니다.

-제주 4.3 평화공원 소개글 중에서-

 

우리 현대사에서 아픈 역사로 기억되는 4월,

4.3사건의 아픔을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즘 상영중인 영화 지슬..

제주의 4.3사건을 제주인들의 시각으로, 그들이 보낸 혹독한 겨울을 그려내고 있다고 하지요.

미디어의 힘이 그리 큰 것일까요?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회자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새삼 제주 4.3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고 있는 듯 합니다.

 

제주 4.3사건,

여행자도 교과서로 배우지 못한 역사입니다.

제주, 그저 관광지로서만의 제주가 아닌

제주 사람들이 살아온 우리의 땅,

제주 사람들이 살아내온 우리의 역사로서 만나볼 수 있는 곳을 찾아가봅니다.

 

끝나지 않은 제주의 눈물을 이야기 하는 곳,

제주 4.3 평화공원입니다. (2013년 3월 9일)

 

 

 

 

차마 이름 붙일 수 없는 슬픔을 기리며....

 

 

 

 

제주 4.3 평화 기념관..

이곳이 세워지기까지 참 먼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수없이 좌절하면서도 여기까지 오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곳..

 

 

 

 

그들의 눈물을 아는지 모르는지

4.3 평화공원 입구에서 바라본 제주는 평화롭기만 합니다.

 

 

 

 

4.3 평화공원 한켠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

1961년 설치되었던 베를린 장벽은 1989년 붕괴된

독일통일의 상징물이지요.

 

2007년 독일 베를린 시가 제주에 기증한 장벽이라고 하네요.

분열과 분단을 넘어서 화합의 상징으로 세워진 듯 합니다.

 

 

 

 

2008년 3월 문을 연 제주 4.3 평화기념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제주의 이야기를 만나보러 들어가 봅니다.

 

 

 

 

역사의 동굴이라 이름붙여진 동굴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를 만납니다.

 

안내문에 적힌 글을 옮겨 적어보자면

-백비는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4.3백비가 놓인 곳에서 고개를 들어보면

아직도 터널속에 자리하고 있는 듯,

하지만 언젠가 저 환하게 빛나는 빛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요?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라고도 적혀 있더군요.

 

 

 

 

전시관은 몇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맨처음 만나는 곳은

<흔들리는 섬> 입니다.

 

일본군의 요새로 전락한 제주도,

아직도 제주 곳곳에 그 시절의 기억들이 남아 있지요.

 

 

 

 

어둠속에서 태극기를 그려야만 했던 이들,

그 표정이 사뭇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해방,귀향, 불안한 희망

통일정부의 꿈은 멀어져만 가고

 

 

 

 

정치지도자들은 갈등하고

물가는 폭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판에서 농사를 짓고, 말을 키우며 묵묵히 살아가던 사람들..

 

 

 

 

그들에게 광풍의 바람이 시작됩니다.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식 개최 중

경찰의 발포로 관덕정과 도립병원 앞에서 주민 6명 사망,

8명 중경상을 당하는 ‘3·1사건’ 발생합니다.

 

 

 

 

경찰 발포사건에 항의하여

1947년 3월 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됩니다.

13일까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6개 기관·단체에서 파업에 가세하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보다 앞서 3월 8일

3·1사건 조사를 위해 미군정청·주조선미육군사령부 합동조사단(단장 카스티어 대령) 이 제주도로 들어옵니다.

 

미군대령은 "제주 도민의 70%가 좌익 동조자"라는 발언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술 더 떠 경무부 최경진 차장은

제주파업 사태 언급하면서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색채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되고

응원경찰과 서청단원 등이 대거 제주로 내려가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시작합니다.

 

검속 한달만에 500여명이 체포됐고,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었다고 합니다.

 

서북청년회 제주도 단장이 ‘제주도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니

서청이나 응원경찰들이 제주도민을 어찌 대하였을지 짐작이 되는 부분이지요.

 

 

 

 

그리고 <바람타는 섬>

 

1948년 4월3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제주도 남로당은 파업과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북청년단 경찰의 잔혹한 탄압으로 민심은 무장대 쪽으로 돌아섰고,

급기야 군은 300여명의 무장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동조한다고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했습니다

체포와 고문, 즉결처형 등이 잔행되었다고 합니다.

 

4.8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지는

‘한국 섬 폭동 발발 46명 사망’이라는 제목 아래 제주사태를 첫 보도합니다.

 

 

 

 

1948년 4월 28일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평화협상 진행. 72시간내 전투중지 등에 합의에 이르릅니다.

 

하지만 며칠뒤인 5.1일

세칭 ‘오라리 방화사건’ 발생해 평화협상 파기
오라리에 괴청년들이 들이닥쳐 민가에 불을 지르고 갑니다.

경찰은 '폭도의 소행'이라고 하였으나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조사를 통해 우익청년단원들이 저지른 방화로 밝혀냈습니다.

 

 

 

 

6.2일 제주주둔 미군사령관 브라운 대령은

 “제주도의 서쪽에서 동쪽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10.7일 송요찬 9연대장은

제주 해안에서 5㎞이상 지역에 통행금지를 명령하면서

이를 어길시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내용의 포고문 발표하게 됩니다.

 

 

 

 

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지대의 수많은 마을이 지도상에서 없어졌고,

노인·아동·여성을 포함한 3만여명이 희생되었으며, 남은 가족은 폭도의 멍에를 안고 살아오게 된 것입니다.

 

 

 

 

같은 해, 10.18일

제주 해안은 봉쇄되고 여수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 제주도에 증파명령이 내려집니다.

 

동족상잔을 반대한다며 파병을 거부한 14연대,

경비대와 경찰 사이의 누적된 갈등까지 폭발하면서

여순 사건의 배경이 됩니다.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우린 산사람이다'라고 말하며 함정 학살도 자행되었습니다.

무장대 복장으로 위장한 경찰이 제주읍 도평리에 들이닥쳤습니다.

경찰은 '우린 산사람이다. 우리에게 협조하고 식량을 제공하라"고 말합니다.

일부 주민들이 그들의 정체를 알아채고 저항했지만

경찰은 주민들을 학살하였다고 합니다.

 

 

 

 

폭도와 국가유공자

 

토벌대는 삼양리의 한 청년이 학살극을 피해 산으로 피신하자

그의 아내와 부모는 물론 처가 식구들까지 '폭도가족'이라며 몰살시켰습니다.

사태가 완화된 후 은신처에서 나온 그는 6.25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그의 군번은 0310413입니다.

 

 

 

 

소개민 집단총살

 

1948년 11.15일 군인들은 가시리에 들이닥쳐 마구 총을 쏘아댄 뒤 소개령을 내렸습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해변마을인 표선리로 소개돼 표선국민학교에 수용됐습니다.

12.22일 토벌대는 호적을 대조하여 '도피자 가족'76명을 속칭 '버들못'에서 학살하였습니다.

 

 

 

 

다랑쉬굴의 비극

 

다랑쉬굴의 유해는 발견 당시부터 4.3 참극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48,12.18일 그 희생은 저항도 못하는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초토화 작전의 실상이었고

 

 

 

 

캄캄한 굴속에 갇혔다가 40년 만에 햇빛을 보았지만(1992년 3.29일-다랑쉬굴 발견)

허무하게 화장된 것은 진실을 은폐하고 외면하려고 했던 당시대의 현주소였습니다.(1992년 5.15일-화장하고 다랑쉬굴은 봉쇄됨)

 

 

 

 

가혹하게 이어진 학살

 

함병선 연대장은 유재흥 사령관이 제주에 온 1949년 3월 말까지 실질적인 진압 책임자였습니다.

미군 비밀문서는

"함병선은 신분이나 무기 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을 폈다" 고 기록했습니다.

이때 '북촌 사건'이 발생했고 봉개리 주민들이 집단 학살되었습니다.

 

 

 

 

1949년 3월 말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 유재흥 대령은 소위 선무공작을 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믿고 나뭇가지에 흰옷을 매어 만든 백기를 앞에 들고 1만 명에 이르는 하산민들이 내려옵니다.

대부분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수개월 동안 감금된 채 심문받고

불법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죽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집단학살 속의 의로운 바람

 

4.3사건 초기, 김익렬 연대장은 평화적 해결을 추진하였습니다.

직접 무장대 진영까지 들어가 평화적 해결을 위한 담판을 벌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제주 4.3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유고록'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문형순 경찰서장은 예비검속자 학살을 거부하였습니다.

제주도내 수백 명씩 예비검속되어 희생되었으나

그가 관할하고 있던 관내 주민은 6명만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해병대 정보참모의 명령서에 대해 '부당하므로 불이행' 이라는 글을 써보내 대량학살을 거부하였다고 하지요.

 

 

 

 

사라져버린 고향

 

잃어버린 마을이 '84곳'

곤을동, 어우눌, 리생이, 드르구릉 등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의 마을들이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습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84곳이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제주 인구의 10%에 달하는,

무려 3만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아직도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가 되고 있습니다.

 

 

 

 

마르지않은 어머니들의 눈물...

 

 

 

 

1960년 4월 혁명 직후 벌어진 진상규명 운동은

5.16 직후 된서리를 맞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탄압받고..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

2001년 1월 4.3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기획단의 발족을 시작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본격화됩니다.

 

 

 

 

2000년 1월 김대중 대통령이 특별법에 서명하고

2003년 10.31일 노무현 대통령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합니다.

 

 

 

 

생명평화의 벽

 

 

 

 

수많은 이들의 기원과 바램,

아픔이 가득한 벽입니다.

 

 

 

 

다크 투어리즘...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를 돌아보는 여행..

 

잊혀진 과거, 제대로 배우지 못한 과거를 돌아보기에 꼭 필요한 여행인 듯 합니다.

제주4.3평화기념관

이곳에서 과거를 만나는 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인 듯 합니다.

 

 

 

 

4.3 평화공원은 이제껏 둘러본 4.3 평화전시관 이외에도

위령탑, 위령제단, 각명비, 행불인 표석, 봉안관 등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호수에 비친 위령탑의 모습이 보입니다.

 

 

 

 

4.3희생자 각명비

제주 4.3사건 희생자로 결정된 14,032명 중 사망자와 행방불명자에 13,887명에 대하여

성명, 성별, 당시 연령, 사망일 등을 새겨 설치한 것입니다.

 

 

 

 

위령탑..

 

 

 

 

위패봉안소

 

 

 

 

여기는 한라산 거친오름 기슭

4.3으로 희생된 영령들이 좌정하신 곳

인류의 염원인 평화와 상생의 기운을

한데 모아 진혼의 불을 지폈으니

그 불꽃은 언 가슴을 녹이고

닫힌 마음을 활짝 열리라

 

 

 

 

자애로운 숨결은 훈풍으로 흐르고

용서와 화해의 꽃은 영원하리니

여기는 평화의 정토

세계 평화가 이로부터 발원하리라..

 

 

 

 

위패봉안소를 돌아 나와

바라보는 풍광은 어쩐지 눈물이 날 듯 합니다.

 

 

 

 

위패봉안소 옆에는 4.3 행방불명 희생자 표석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고

적혀있던 4.3 백비..

그 백비가 바로 세워지기를 바래보며 돌아서 여행자의 눈에 들어온 오름..

 

수많은 제주의 눈물을 바라본 오름은

과거를 모두 품에 안고

묵묵히 오늘도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밖에 자세한 안내를 원하시면 클릭해 보세요

제주 4.3평화공원 http://jeju43.jeju.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