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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상남도

꽃은 져도 향기는 남았어라-산청 산천재 수령 450년 된 남명매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쓴다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남명 조식 선생께서 예순한 살에 지리산 덕산으로 옮겨와

이곳 산천재를 짓고 시냇가 정자에 써 붙였다는 시입니다.

 

평생 벼슬과 담을 쌓았던 남명 선생이 말년에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이곳 산천재에

선생은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나무 한 그루를 뜰에 심고 벗을 삼았다고 합니다.

 

남명 선생이 심었다는 매화나무,

수령 450년 되었다는 매화나무,

산천재 앞 마당에 고고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2012년 4월 8일)

 

여행자가 찾아간 날에 매화는 이미 지기 시작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꽃은 져도 향기는 남는다고 하였던가요?

 

지는 매화 향기의 긴 여운에 취해봅니다.  


 

 

 

우리나라 매화 10선을 선정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경남 산청의 삼매(三梅)가 있습니다.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의 원정매와 단성면 운리 마을 정당매, 시천면 산천재 남명매가 그것입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산청 삼매는

세속을 등진 채 은둔생활을 했던 옛 선조가 뜰에 심어놓은 것으로

수령이 오래된 것은 500~600년을 넘나듭니다.

 

오늘은 이 삼매 중에서 먼저 산천재 남명매를 소개해봅니다.

 

산천재에 도착하고 보니,

오른편은 산천재, 왼편은 남명선생의 여재실과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덕천서원이 자리하고 있어

남명 선생 유적지들을 한번에 돌아 볼 수도 있습니다.

 

 

 

 

산천재 입구에는 매화향기 바람에 실려 날리고,

산수유 노란빛으로 피어 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실천유학의 대가 남명 조식(1501∼1572년) 선생이 예순 한 살에 둥지를 튼 산청,

지리산이 보이는 이 자리에 선생은 산천재를 짓고 후학을 길렀다고 합니다.


 

 

 

 

따스한 봄날,

저 마루에 올라 그저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도 좋겠습니다.

 

바람결에 매화 꽃잎 날아와

편지지 위에 앉아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듯한...

 

 

 

 

유혹을 겨우 뿌리친 여행자는

산천재로 향합니다.

 

요즘은 나무의 그림자가 자꾸만 여행자의 눈에 들어옵니다.

 

 

 

 

하얀 목련 담장 곁에 서서 활짝 피어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볼 때마다 저절로 나오는 탄성,

참으로 좋은 봄날입니다.

 

 

 

 

산천재 마당으로 들어서니

남명매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꽃은 피었다 지고 있는 중,

그러나 향기는 남아 여행자의 마음을 어지럽히는군요^^

 

산천재(山天齋)라는 이름은 주역에 나오는 대축계(大畜卦)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 괘는 하늘이 산 속에 있는 형상으로,

군자가 그 형상을 본 받아 강건하고 독실하게 스스로를 빛냄으로서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하라는 뜻에서 취했다고 합니다.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가 뒤틀려서 위로 뻗어 오른 매화 나무는

450여 년의 연륜을 자랑합니다.

 

해마다 3월 하순이면 연분홍빛이 도는 반겹꽃이 가득 피는데 그 향기가 지극히 맑다고 하지요.

 

이 매화나무는 선생이 61세 되던 해에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심었다고 합니다.

기품 있는 모습이 선비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은 이 매화를 남명매라고 부릅니다.

 


 

 

우연히 읊다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 찍다가

큰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있네

 

지고 있는 매화가 아쉬워,

고목 끝에 핀 아쉬운 매화를 한장 담아봅니다.

 

 

 

 

1572년 남명 선생이 산천재에서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덕계 오건과 곽재우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입니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최초로 대대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지요.



 

 

 

"나의 이름 앞에 어떤 벼슬도 쓰지 말라. 오직 '처사'로 쓰는 게 옳다.

만약 벼슬을 쓴다면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며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제자들 앞에서 선비의 지조를 놓지 않았다던 남명 선생..


 

 

 

오른쪽의 작은 누각은 남명선생 문집 책판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남명 선생의 시문집의 제작을 위해 제작한 목판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최후 간행본으로 185매로 된 6책의 완전한 분량이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남명 선생이 살다간 산천재에서 바라보면

앞으로는 덕천강이 무심한 듯 흐르고,

450년을 살아낸 매화는 그 강을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세한삼우(歲寒三友)

예로부터 매화와 소나무, 대나무를 일컬음이지요.

절개의 상징으로 불의에 굴하지 않고

세상에 물들지 않는 올곧은 선비의 정신에 비유되기도 하는 세한삼우..

 

그 소나무,산천재 한켠에 서서

그 선비의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진정한 은둔의 지사였던 남명의 정신이

해마다 봄이면 산천재의 뜰에 은은히 스며든다는 산천재,

내년 봄이 되면 다시 길 나서볼 일입니다.

 

 

산천재 찾아가는 길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466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 단성ic- 시천, 삼장 방면으로 우회전- 사리교차로에서 우측도로- 산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