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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봉긋 솟은 왕릉. 그속에 숨쉬는 1500년 전 대가야의 역사-고령 지산동 고분

 

사백년 동안, 왕들의 상여는 능선 위로 올라갔다.

김훈의 현의 노래의 한구절입니다.

 

신라의 왕릉도, 조선의 왕릉도 산 위로 올라간 적이 없는데 가야의 왕릉은 유독 산에 있습니다.

무덤을 높은 곳에 써서 왕의 힘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스스로도 자신의 땅을 굽어보고 싶어서 였다고 합니다.

2010년 5월 17일. 경북 고령을 다녀왔습니다.

1500년 전의 대가야을 품고 있는 이곳을 처음 가게되었습니다.

 고령읍 지산리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가야 최고의 고분군.. 지산동 고분군

그 고분군의 입구에 지산동 30호 고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경북 고령은 가야왕국 중 가장 강대했던 대가야가 번성했던 땅입니다.

하지만 가야라는 나라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또렸하지 않습니다.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AD42년부터 562년까지 520년 동안 존속했던 대가야의 경우 문헌에 등장하는 왕의 이름도 겨우 5명 뿐이니, 우리는 가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가야의 고분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30호분, 44호분. 47호분..

이렇게 숫자로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30호분은 주산 남동쪽 능선 자락의 끝에 단독으로 자리잡고 있는 고총고분으로 5세기 중엽 대가야 지배층의 분묘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크기는 동서 18m, 남북 15m이며 남아있던 봉토의 높이는 1.5m였습니다.

1994-95년에 영남문화재 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으뜸돌방 및 딸린 덧널이 T자 모양, 순장 덧널 3기가 ㄷ자 모양으로 동.남.북쪽에 배치되었습니다.

남동쪽 경사면에 등고선 방향으로 구가 둘러져 있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는 제의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토유물들은 바리모양 그릇받침과 목긴 항아리, 손잡이 달린 항아리, 굽다리접시 등의 토기류와 덩이쇠, 말갖춤새, 무구, 금동관 등 다양합니다.

 30호분을 지나 오르는 길은 걷기에 참 좋습니다.

크고 작은 200여기의 고분이 자리하고 있는 능 사이로 놓인 길을 걸어 올라갑니다.

과거 죽음의 땅이었을 테고, 신성한 궁전같은 곳이었을 이곳은 이제..

산책로처럼 느껴집니다.

 소나무 그늘아래 땀을 식히며..

                                           

바라보는 풍경 속에도 수많은 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확인된 것만도 200여개, 재조사를 하면 400여개는 될 거라고 합니다.

능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왕인지, 고관대작인지 알려진바가 없습니다.

고분군이 다 왕릉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많은 능 중 발굴조사를 마친 능은 10개 뿐...

출토유물을 보고 무덤의 주인을 추정할 뿐...

 44호분.

지산동 44호분은 구릉의 꼭대기에 열을 지어 늘어선 5기의 대형분 중에서 남쪽으로 100m정도 떨어진 경사면에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977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으며 봉분 지름 27m, 높이 6m의 규모입니다.

내부구조는 으뜸돌방과 남. 서돌방 3기와 이를 둘어싸듯이 방사상과 원주모양으로 배치되어 돌방과 같이 만들어진 32기의 작은 순장덧널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물은 대부분 도굴 되었지만, 남은 것으로 금귀걸이, 청동그릇, 은장식최창,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 등이 있어 원래는 아주 다양하고 많은 순장품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 오끼나와가 원산지인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는 대가야의 원거리 대외 교역활동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고 합니다.

이러한 무덤의 입지, 규모와 구조, 출토 유물을 통해 볼 때 이 고분은 가야고분 중 최고 지배층의 무덤인 왕릉으로 추정됩니다.

  지산동 44호 고분 발굴 전경.

 44호분을 발굴할 당시 32개의 순장곽 가운데 18기의 순장곽에서 22명의 순장자가 발굴되었다고 하지요.

조사결과 한날한시에 묻힌 것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이를 순장의 증거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순장은 풍습이었습니다. 신라 지증왕 때 502년 남녀 5명씩 순장했던 풍습을 페지하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순장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처럼 영혼의 삶이 지속된다"는 계세사상에서 행해졌습니다.

 지산동 47호분

지산동 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고분으로 1939년에 발굴 되었습니다.

봉북의 직경이 49m, 석실 크기가 9.8m X 1.8m로 금림왕릉의 구전되며, 출토 유물로는 금동제 호록, 황어뼈, 금장환두대도, 이형금동제품, 철촉 30점 등이 있고

대가야 이뇌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전형적인 순장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1500년의 세월은 무심히 흐르고..

 그 세월 동안 무덤가의 풀꽃들은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고...

  

 고령의 주산 주변의 수많은 능들..

이들은 고령 읍내를 내려다보며 누워 있습니다.

 

대가야의 전성기에는 고령지역을 중심으로 합천, 거창, 함양, 산청 등 영남지역은 물론, 남원, 장수,진안,임실, 구례, 순천 등 호남지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대가야는 고구려, 신라, 백체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당하게 고대국가로까지 발전한 나라였습니다.

대가야를 포함해 성산가야(성주), 금관가야(김해), 소가야(고성), 아라가야(함안), 비화가야(창녕)를 6가야라고 하였습니다.

 AD42년 대가야의 전신 반로국을 건국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정견모주라는 가야산의 여신과 이비가라는 하늘신 사이에 태어난 뇌질주일이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되었다는 건국신화가 신라말 최치원 선생의 저서를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2000년 쯤 전 가야산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만물상 바위 부근에 한 여신이 살고 있었습니다.

성스런 성품과 아름다운 용모, 착한 마음을 가진 산신 <정견모주>였습니다.

산신의 소원은 인간이 살기 좋은 터전을 닦아주는 것. 그는 밤낮으로 정성을 바쳐 하늘에 소원을 빌었습니다.

어느 봄날 이를 가상히 여긴 하늘신 <아비가>가 오색 꽃구름 수레를 타고 가야산 중턱 가마바위에 내려앉았습니다.

산신과 하늘신은 물 맑고 공기 좋은 산속에서 감응하여 옥동자 둘을 낳았는데 형은 대가야 시조 이진아시왕이 되고, 아우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는 설화입니다.

 

 대가야왕릉 전시관

지산동 44호분의 내부를 원래의 모습대로 재현한 전시관입니다.

이날이 월요일이었던 관계로 휴관입니다. ㅠㅠ

  고분과 고분을 이어주는 다리..

1500년 전은 칼과 창의 시대였습니다.

왕과 제후의 힘은 철에서 나왔습니다.

가야는 바로 그 철기 문화가 꽃 피던 곳입니다.

여기에 복원된 제철로 모형은 대가야의 철생산 기술을 알아보기 위해 고대의 방법으로 제철로를 만들어 실험한 것입니다.

2005년 제철로를 만들고 고령군 쌍림면에 있는 고대 철생산 유적 주변에서 철광석을 채취하여 참나무 숯과 함께 넣고 12시간 이상 풀무질로 바람을 불어 넣으며 철광석을 녹여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철이 만들어 졌고, 유리와 같은 찌꺼기도 흘러 나왔다고 합니다.

 

 대가야역사관의 모습입니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휴관~ 

이곳 외에도 우륵 박물관까지 해서 대가야박물관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는 유물들을 사진을 통해 만나봅니다.

 

   

야외 전시장에는 대가야 시대의 집과 창고가 세워져 있습니다.

움집은 집의 앞쪽은 직선이지만 뒤쪽은 둥근형태이며, 땅바닥 아래로 약 10cm정도 파 들어간 움집이라고 합니다.

바닥에는 뒤편으로 치우쳐 불을 지핀 화덕자리가 있고, 벽을 따라 연기가 양쪽으로 나가도록 한 난방시설인 구들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옆의 건물은 다락창고입니다.

주로 곡식이나 숯 등 습기를 피해야 할 물건들을 보관한 창고의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고령의 불교 문화재들..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

 

 꽃은 피고 지고..

 

쇠로 일어선 가야는 562년 신라 진흥왕의 칼에 무너졌지요.

가실왕의 명령으로 가야금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우륵도 신라에 망명했다지요.

신라는 가야의 소리까지 차지한 셈이지요.

 

고령사람들은 뒷산에 능을 이고 1500년이나 살아왔습니다.

역사가 희미하긴해도, 여긴 가야가 실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