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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기권

백제 온조왕의 궁궐터라고 전해지는 남한산성

 

 요즈음은 서울에서 눈구경하기가 힘들어졌네요. 우리나라가 아열대화하고 있다지요. 제주도는 3년 동안 영하로 내려간 적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도 하구요.

지난 12월 23일은 오랜만에 눈이 온 다음날이었지요. 눈사진을 찍으러 어디로 갈까하다가, 남한산성으로 향합니다. 남한산성에서 바라보는 서울 야경도 멋지다기에

겸사겸사 나선 길입니다.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의 모습.

 수어장대 앞 마당에, 돌담에는 흰눈이 소복히 쌓여 있습니다.

 남한산성 남문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산성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침괘정입니다. 건립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 영조 27년(1751) 때 광주 유수 이기진이 중수하고 침괘정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이 일대는 옛부터 백제온조왕의 궁궐터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침괘정의 오른편에는 옛날에 군기창고가 있어 명나라의 사신 정룡이 '총융무고'라고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 일대에 무기고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체 건물의 평면 중 5칸에 12평 가량의 온돌이 설치되어 있고 정면 2칸 측면 3칸에 마루방이 있으며 그 반대편으로 약 5자 폭으로 퇴마루를 회랑처럼 둘러놓았습니다. 건물 구조로 보아서 이 건물은 집무실로 쓰였고 무기고나 무기 제작소는 침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수어장대를 향해 오르다보면 행궁이 보입니다.

 

행궁은 도성 안의 궁궐이 아니라 임금이 거동할 때 머무는 별궁 또는 이궁을 말하며, 조선조의 행궁으로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부안행궁, 온양행궁 등과 함께 남한산성의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 이라 하였습니다.

이 행궁은 상궐, 하궐로 구분되고 좌전(행궁의 종묘), 우실(행궁의 사직단)이 뒤에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또 행궁 뒤 언덕에는 숙종때 재덕당이 세워졌고, 하궐 앞에는 정조 때 한남루라는 외삼문의 누문이 세워졌습니다 (1798년)

 여기서 상궐은 내행전(행궁의 내전)으로서 1625년(인조3)에 준공한 70여 칸 건물이며, 서쪽 담에 문이 있어 좌승당으로 통하였습니다.
또 하궐은 외행전으로서 상궐과 동시에 지었고, 상궐의 삼문밖에 있으며, 서쪽담의 문으로 일장각과 통하는 것으로 중정남한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궐의 규모는 154칸으로 광주부읍지에 전한다고 합니다. 남한산성 행궁터는 1999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서 1차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2000년에 2차 발굴조사를 완료하였고, 2002년에 상궐 72.5칸의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고 합니다. 

영녕전은 왕의 5대 이상의 조상을 모신 곳으로 원칙적으로는 정전에는 왕의 선친부터 고조까지의 4대와 건국시조만을 모시고 나머지는 모두 영녕전에 모신다고 합니다.

 

 술이 취한 사람이 앉아 있으면 술이 깬다는 전설이 있다는 취성암입니다.

실재로 이곳에 앉아 있으면 가슴 속까지 시원해진다고 하니, 남한산성에 오르시거든, 지나치시지 마시고, 가 보세요.   

 남한산성 성곽이 보이네요.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에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쪽의 방어 시설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천연요새지로 백제, 신라에서도 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북방의 방비책으로 광해군 13년(1621)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고, 이괄의 난 이후 인조 2년에 수어사 이서에서 명하여 대대적인 국가사업으로 증축하여 2년 뒤 1626년에 완공한 곳이라고 하지요.

 

성 안에는 군사시설은 물론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과 관아시설, 방어시설인 4장대와 출입시설 문루 그리고 승병 주둔을 위한 사찰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문루를 비롯한 여러 시설물들을 수차에 걸쳐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한 곳이지요. 

 수어장대 앞의 청량당입니다.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때 동남쪽 부분을 책임지고 공사하다가 공사경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이회와 이 소식을 듣고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그의 부인 송씨와 소실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당입니다.

이회는 누명을 쓰고 죽을 때 자신이 죄가 없으면 사형을 당할 때 매가 한 마리 날아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회가 죽으려는 순간, 과연 매가 한마리 날아와서 사형당하는 장면을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이회가 죽은 후 공사비 횡령 사건이 다시 조사되었는데, 조사 결과 그가 한 공사는 모두 충실하게 축조되었고 공사비를 횡령한 사실도 없음이 밝혀지자,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뜻으로 초상을 안치해 두었다고 합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혿처마에 팔각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수어장대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이곳 청량산에 있습니다. 성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곳입니다. 왼쪽에는 사당인 청량당이 있고 뒤쪽에는 2개의 우물이 있어 장대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물을 공급하였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인조 2년 1624년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 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6년 1751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 누각으로 다시 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합니다. 아래층이 정면 5칸 측면 3칸, 위층이 정면 3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 양식의 이층 누각입니다. 

 

무망루

조선 영조 27년 광주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 문루로서 그 편액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하여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무망루 현판

 남한산성 서문

 남한산성의 성벽

 위에서 내려다본 서문의 모습

 서문에서 바라본 해넘이

 하늘은 붉고 관악산 위로 해는 하루를 마감합니다.

 해는 순간.. 구름 사이로 얼굴을 감춥니다. 해넘이는 늘 장엄하기만 합니다.

 서문 위쪽에서 찍는 서울의 야경

 이날 헤이즈가 너무 심해서, 시야가 좋지 않습니다.

 멀리 남산까지 보이기는 하는데... 흐릿해보입니다.

 

 올림픽 대교의 모습도 멀리 보이네요. 날씨가 좋은 날 다시 올라야 할 듯 합니다.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 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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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김훈의『남한산성』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