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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상남도

여름 날은 간다-배롱나무 꽃을 보러 간 산천재와 남명기념관

 

여름날이 갑니다.

꽃이 피고, 지고, 또 다시 피고, 지고.. 

백일 붉다는 꽃, 

배롱나무 꽃이 피고 지며

여름날이 갑니다. 

 

그 여름 날의 하루, 

산청 덕천서원, 산천재, 남명 기념관을 찾아 갑니다. 

 

여름 날은 간다... 

배롱나무꽃을 보러 간 산천재, 남명기념관입니다. (2023년 8월 26일)

 

 

 

 

 

산청 덕천서원을 둘러보고

근처에 자리한 산천재로 향합니다. 

 

 

 

 

 

 

 

찾아 가서 보니 

산천재 

예전에 매화를 보러 온 적이 있는 곳이네요

 

 

 

 

 

 

 

 

 

 

 

 

 

입구의 아름드리 나무

돌담 앞에는 배롱나무.. 

 

 

 

 

 

 

산천재.. 

 

평생 벼슬과 담을 쌓았던 남명 선생이 말년에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곳으로, 

선생은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나무 한 그루를

뜰에 심고 벗을 삼았다고 합니다.

 

 

 

 

 

 

 

 

 

 

 

 

남명매...

남명선생이 심었다는 

수령이 450년이 넘은 매화나무

 

 

 

 

 

 

산천재 앞 마당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 매화나무 꽃 핀 걸 보려고

이곳은 찾은 것이 10년이 넘은 일이네요. 

 

우리나라 매화 10선을 꼽을 때

그 중에 하나가 이곳 산천재 남명매라고 하지요. 

 

 

 

 

 

 

산천재 담장에 소나무 

그 모습이 독특하여 한 장 담아봅니다

 

소나무 뒤로는 지리산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산천재를 나오니 

길 건너에는 남명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세워진 비석

남명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조가 내린 제문을 새겨놓은 비석이라고 합니다

 

 

 

 

 

 

마을 곳곳에는 남명 조식선생에 관한 벽화가... 

 

 

 

 

 

 

 

남명기념관으로 들어가 봅니다

 

 

 

 

 

 

남명 조식 선생의 동상이... 

 

남명 조식 선생(1501~1572)의 고향은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라고 합니다.

선생은 61세이던 1561년 거처를 산청 덕산(지금의 시천·삼장면 일원)으로 옮겨

덕천강변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습니다.

노년에 접어든 선생이 고향이 아닌 산청을 찾은 것은 지리산을 무척 흠모했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자신이 쓴 지리산 견문록 ‘유두류록’에

“두류산(지금의 지리산)을 다섯 방향으로 열한 번이나 갔었다”고 자술하고 있는데

그의 지리산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남명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처사(處士)로 지냈으나

왕에게 직언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고,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고 합니다.


 

 

 

 

 

남명기념관에 들어가기 전

배롱나무 꽃을 담아봅니다

 

 

 

 

 

 

 

 

 

 

 

 

 

 

 

 

 

 

 

 

 

남명기념관

 

 

 

 

 

 

기념관을 들어서면 

바람직한 내면과 도덕을 성곽으로 도식화한 ‘신명사도(神明舍圖)’가 중앙에 걸려 있습니다.

직역하면 ‘정신을 밝히는 집 그림’ 정도라고 합니다.

그림의 중심에는 ‘경(敬)’이 있습니다.

항상 깨어 있는 마음으로 언행을 다스린다는 뜻이라는데,

그가 평생의 교훈으로 삼은 두 마디,

‘내면을 밝히는 것은 경(內明者敬),

바깥으로 결단하는 것은 의(外斷者義)’ 글귀도 씌어 있습니다.


 

 

 

 

 

남명학맥도

남명정신의 계승... 

 

 

 

 

 

 

 

 

 

 

 

 

 

 

 

 

 

 

 

 

 

남명은 “실천하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죄악”이라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의 실천 중시 사상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 전제돼 있었다고 하지요.

이런 선생의 가르침은 문하에서 공부한 후학들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앞다퉈 의병활동에 나서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와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 장군을 비롯해

이노, 전치원, 하락, 조종도 등을 비롯해

50여명의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나서 왜군을 물리치는데 앞장섰다고 합니다. 

 

 

 

 

 

 

남명기념관 옆에 자리한 여재실.. 

남명선생과 부인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고 안내되어 있습니다

 

 

 

 

 

 

여재실 앞 마당에 

저 작은 꽃에 벌들이 많이 보입니다. 

 

올해의 배롱나무꽃은 여기까지 일 듯 합니다. 

이제 가을 꽃을 보러 길 나서보아야 할 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