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을 찾아 길을 나설 때,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을 보고 난 후 나선다면?
그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 되겠지요.
문화유적 답사에 여행자가 길잡이로
좋아하는 책 중 하나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입니다.
최근 나온 신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에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국 유교 건축의 걸작으로 가장 매력적인 서원으로 꼽히는 도동서원..
동방오현의 한 명으로 조선 성리학 최고의 인물로
추앙받는 김굉필 선생을 기리는 도동서원입니다. (2011년 7월 3일)
사진은 도동서원의 누각 수월루에 올라 바라본 서원의 모습입니다.
이곳 서원의 담장은 보물 350호라고 합니다.
전국 최초로 토담이 보물로 지정된 곳입니다.
도동서원 앞에는 가지가 무성한 400년 된 은행나무
낙동강을 굽어보며 서 있습니다.
높이가 25m, 줄기 둘레가 8.7m인 나무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숲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나무는 조선 선조 40년(1607년)에 김굉필의 외증손 한강 정구가
도동서원 설립을 기념해 심어서 '김굉필 나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김굉필 선생은 조선 전기 성리학자로서
벼슬길보다는 학문과 교육에 치중하여
성리학과 사림 정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하지요.
그리하여 광해군 2년(1610년)에는
조선 성리학의 전통을 계승한 '동방오현'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거대한 은행나무를 수문장으로 거느리고 서 있는 도동서원..
도동서원은 김굉필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으로
서원 건축의 정석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합니다.
서원 맨 바깥쪽 누각에서부터 이어지는 서원의 배치는
위로가면서 한단씩 높아지며
맨 위에 위치한 서당까지 일렬로 늘어서 있는 형태라고 합니다.
또한 산을 등지고 강을 굽어보는 배산임수의 배치..
은행나무 뒤로 서원으로 향합니다.
도동서원의 누각인 수월루..
4단에 걸쳐 쌓은 웅장한 석축과 그 위에 올라앉은 누각
수월루 담장을 감싸고 있는 배롱나무들..
이곳도 배롱나무 붉은 꽃 피는 여름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군요.
누각을 지나면 중정당으로 통하는 환주문..
'주인을 부르는 문?'
환주의 뜻은 '내 심성의 주가 되는 근본을 찾아 부른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곳 서원은 곳곳에 아름다운 돌조각들을 볼 수 있는 곳인데,
환주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첫머리의 소맷돌에는
연꽃 봉오리가 소담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의 풍모를 닮은 선비가 되라는
그런 뜻이라고 하더군요.
환주문 맨 꼭대기에 올려진 절병통도 눈에 띕니다.
여러 면이 모이는 모임지붕 정 중앙은 빗물이 들어가기 쉽다고 하지요.
그래서 저렇게 절병통을 올려 건물을 보호하는데,
절병통들의 모양 자체가 아름답습니다.
지금은 따로 만들어 올린 모양인데,
20~30년 전만 해도 그냥 시루를 올려놨다고 합니다.
또한 환주문의 현판 옆에는
닭이 머리를 내밀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 닭처럼 일찍 일어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환주문은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설 수 있는
낮고 좁은 사주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강학의 공간에 들어서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의 여닫이문을 세워 놓은 정지석이
필요 이상으로 큰 꽃봉오리 형태로 박혀 있는데
이 또한 이곳을 들어서는 이들이
낮은 문을 통해 들어오면서
몸가짐과 걸음걸이를 조심하도록 하기 위함인 듯...
환주문에서 눈을 돌려 옆으로 보면,
도동서원강당사당부장원... 보물 350호..
이름만 듣고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던..
도동서원의 강당과 사당, 그리고 담장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지요.
보물로 지정된 도동서원의 담장..
자연석을 정렬시킨 지대석 위에 자연막돌을 쌓고
그 위에 암키와를 5단으로 줄 바르게 놓아
그 사이에 진흙층을 쌓아 올리고 1m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워 넣어 장식효과까지 살린 아름다운 담장입니다.
전국 최초로 토담이 보물로 지정될만큼 아름다운 담장입니다.
담장 너머로 중정당이 보이고,
좌우측으로 서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재를 거인재(居仁齋), 서재를 거의재(居義齋)라
이름 붙인 것을 보면
유교의 중심 사상인 인의(仁義)를 강조한 듯싶습니다.
환주문에서부터 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까지는
납작하게 다듬은 돌을 깔아 사람 하나 지날만한 돌길을 내어 놓았습니다.
이 돌길과 중정당의 중앙 부위의 축대가 만나는 곳에
돌출된 돌거북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앙다문 입 양쪽에 송곳니가 날카롭고 길게 나와 있으며
이마에 잔뜩 힘을 준 사나운 형상입니다.
이 돌거북의 의미는 강학 공간인 중정당 마당에서는
뛰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묵언의 가르침을 주는 상징이며
중앙 길은 스승만 다닐 수 있는 길이니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또한 이곳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중정당 건물이 얹힌 기단입니다.
기단길이17m, 높이가 1.5m에 이르러 건물의 위엄을 더해주는 것 외에도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하고 재미있는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마당 가운데 돌거북을 중심으로 기단 양편으로 계단이 있으며
기단은 사각형부터 12각형의 돌들을 조각보를 잇듯이
돌 사이의 간격에 빈틈이 없게 정성으로 쌓아올려서
멀리서 보면 은은하고 조금씩 다른 색감을 가진 돌의 질감이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똑 같이 자른 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돌을 모서리만 다듬어
쌓는 데는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었을 것이되
후대에 남겨진 석면을 보는 이는 그 정성의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12각형의 돌이 석축 기단에 사용된 예가
우리나라에서는 이곳 도동서원이 유일하다고 하는데
마치 남미 잉카제국의 유적인 쿠스코의 12각돌을 보는 듯 합니다^^
기단 갑석 바로 아래는 네 마리의 용이
머리만 내밀고 있는 조각이 튀어나와 있습니다.
이곳이 낙동강의 흐름 중 강폭이 좁아지고
물이 돌아나가는 곳이라 수해가 잦았던 탓에
수재를 예방하는 액막이용으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용은 물의 신이라 화재예방의 의미도 담고 있구요.
마치 이는 절집에서 당우의 처마 밑에 설치한 용두를 보는 듯 하며
도동서원에 설치된 용머리는 사납지 않고 각각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용머리가 사납다기 보다는 익살스러운 모습인 듯 하네요.
도동서원은 돌 장식들을 찾아보는 즐거움이 있는 곳입니다^^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1605년 완공되었으며 서원을 감싸는 담장과 더불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조선 최고의 유학자로 꼽히는 퇴계 이황,
그리고 역시 당대의 학자이자 김굉필의 외증손자인 한강 정구가 앞장서서 이 서원을 지었다고 하지요.
선조의 이름이 걸린 도동서원 현판..
그리고 중정당 현판..
넓디 넓은 마루가 인상적이었던..
중정당 앞에는 관솔불을 밝히던 정료대가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서는 중정당 기둥 위의 흰색띠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 듯 합니다.
이 서원은 바로 김굉필(1454~1504)선생을 모시는 서원이라고 말씀드렸었지요.
김굉필 선생은 조선 최고의 고집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고집이 대단하였던 분이라고 하지요.
그는 김종직을 스승으로 모시며 공부를 시작하였지요.
늦게 배운 공부에 빠진 김굉필은 나이 마흔에야 관료 세계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조선 성리학의 중심인물이 됩니다.
학문이 아주 높지 않았던 그가 신진 개혁 세력인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한 데에는
그의 깐깐하고 지독한 성격도 한몫을 했다고 합니다.
남들을 비판하는데도 거침이 없었고 하지요.
비판 당하는 기득권 거물들은 천하의 독종 김굉필이기에 기싸움에서 밀리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꼬장꼬장하고 과격한 탓에 적들에겐 그가 최우선 제거 대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산군 4년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김굉필은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에 휘말려
평안도로 귀양을 갑니다.
그리고 6년 뒤, 갑자사화로 김종직의 수제자란 이유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납니다.
당대에 이렇게 모진 수난을 당한 김굉필은 이후 사림이 힘을 얻으면서
한국 성리학의 적통을 잇는 대표자이자 숭배의 대상으로 거듭납니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물러난 뒤 정권을 잡은 사림의 대표였던 조광조는
그의 우상이었던 김굉필 복권에 나섰습니다.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영의정으로 추증됐고, 마침내 ‘동방오현’의 한 명이 되었습니다.
동방오현’은 우리나라 성리학 최고 인물 5명을 꼽은 것입니다.
이 다섯 명은 시대 순에 따라 서열이 정해져 있는데 5등 격이 바로 퇴계 이황 선생입니다.
그 위로 회재 이언적선생이 4번째, 당대 최고 인물이었던 조광조가 3번째,
2번째가 대학자 일두 정여창선생입니다.
그리고 최고 인물인 첫 번째가 바로 김굉필 선생이라는...
말이 좀 길었지요?
저 흰 띠는 동방오현의 첫 번째인 김굉필 선생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인셈이지요.
여름 날, 대청마루는 참 시원스럽습니다.
보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중정당 뒤로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일부러 정교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스러운 모양을 살려 척척 쌓은 폼인데
똑같은 각도로 올라가지 않고
처음에 가팔랐다가 다시 완만해집니다.
계단 난간에는 봉황이 조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떨어져 나가고 없다고 합니다.
계단 끝에는 사당으로 들어서는 문이 나오고..
사당입니다.
봄 가을이면 향사를 올리고 매달 두 번씩 분향례를 치르는 곳입니다.
사당 또한 돌로 된 기단 위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돌로 치장한 서원..
기록을 보면 이 서원이 한번 불타 다시 지을 때 전국 유생들이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굉필을 모시는 의미가 큰 서원이다 보니
애초 모으려던 돈보다 훨씬 더 많이 모였다는 것이지요.
남은 돈을 돌려주거나 다른 일에 쓸 수도 있었겠지만
취지를 살려 서원 개축에 모두 쓰기로 했다는데,
그러다 보니 이렇게 꾸밀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사당 옆에도 아름다운 담장을 볼 수 있습니다.
서원을 한바퀴 둘러보고 나오는 길..
들어갈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건물 한채와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군요.
도동서원 앞에서 차를 타고 다람재로 오릅니다.
다람재에서 바라보면 도동마을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오른편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왼편으로 도동서원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낙동강 건너편에 주차장이 보이고
그 뒤로 자리한 도동서원이 조금씩 위로 올라가며 앉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도동서원 앞에 자리한 고령포..
고려팔만대장경이 이곳 포구를 통해 합천 해인사로 갔다고 하지요.
도동서원..
‘성리학의 도가 (중국에서) 동쪽(조선)으로 왔다’는 뜻..
조선 후기 모든 선비들이 가장 높게 떠받들었던 김굉필에게 바치는 헌정의 집입니다.
흥선대원군 때 대대적인 서원철폐로 전국에 47개 서원만 남게 되었을 때,
그 가운데 속한 당당한 서원이며,
안동의 병산·도산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영주의 소수서원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서원 중의 하나인 곳입니다.
이런 서원을 둘러보는 일은
김굉필이란 사람에 대한 생각..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란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무더운 여름,
낙동강가에 시원하게 자리잡은 서원..
배롱나무 붉은 빛 가득할 때,
다시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도동서원 찾아가는 길
위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1번지
중부내륙고속도로 현풍 IC 에서 구지방면 - 67번 국도 - 도동서원
우리나라 5대 서원을 아직 보지 못하셨다면,
배롱나무 꽃 필 때 꼭 가봐야 하는 곳- 병산 서원 http://blog.daum.net/sunny38/11775134
한국 서원의 종가, 도산서원을 가다 http://blog.daum.net/sunny38/11775145
사백 육십년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 소수서원 http://blog.daum.net/sunny38/11775207
경주 옥산서원은 지난 겨울에 다녀왔는데, 아직 포스팅을 못했네요.
빠른 시간 내 포스팅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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