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세계 도자비엔날레가 오는 4월 25일부터 5월 24일까지 경기도 여주, 광주, 이천에서 동시에 개최된다고 합니다.
세계 도자비엔날레를 홍보하기 위해서 여주군에서 초청한 여주 블로그 팸 투어에 다녀왔습니다.(2009년 4월 11일)
영릉- 현대 도자 미술관- 영월루- 신륵사- 가정리의 도예 공방- 고달사지로 이어지는 일정이었지요.
강가에 위치한 신륵사는 제가 좋아하는 곳이라 제일 먼저 포스팅해 봅니다.
남한강변에 자리한 신륵사의 강월헌의 모습입니다~
신륵사 전경입니다.
신륵사는 여느 사찰과 달리 강가에 위치해 있어, 가족과 연인과 함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
신륵사로 가는 길입니다. 벚꽃이 피어 있는 길을 사진을 찍으며.. 바람에 날리는 꽃잎을 맞으며 걸어갑니다.
경기도 세계 도자비엔날레가 열릴때, 도자기 전시관이 되지 않을까 싶은 곳입니다.
신륵사 가는 길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신륵사를 향해 가는 길.. 전에는 보지 못한 연못이 생겼네요. 나무 다리도 생기고, 자그마한 분수도 생겼습니다.
신륵사 일주문을 가기 전에 원호장군 전승비가 있습니다.
원호장군(1533-1592)은 원주 원씨로 여주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무신입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머물고 있던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관병과 민병 등 300여명을 규합하여 신륵사의 팔대숲 일대에서 도강을 기도하는 왜병을 섬멸하고, 구미포에 집결한 왜적을 새벽에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같은 여강 일대에서의 전투는 무인지경으로 북진하던 왜적을 육전에서 격파한 최초의 대승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후 여주 목사 겸 경기, 강원 양도 방어사로 임명되었고 강원도로 전임하여 금화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장이라고 합니다.
원호장군 전승비를 보고나서, 강변을 보며, 슬슬 걷다보면, 어느새 일주문 앞입니다.
일주문의 오른쪽의 풍경
노오란 개나리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이제 신륵사 경내로 들어섭니다.
세심정... 마음을 씻고, 절집으로 향합니다.
신륵사의 명부전 앞..
문화해설사 분이 나오셔서, 감기로 목이 잠기신 상태에서 열심히 설명을 하십니다.
명부전의 문에서 세월이 느껴집니다.
절집에 가면 이런 굴뚝이 눈길을 끕니다. 기와와 흙으로 만들고, 옹기로 굴뚝을 만들고..
신륵사 조사당과 향나무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자리 잡은 신라 시대에 건립된 유서 깊은 고찰입니다.
이 절이 크게 번창한 것은 고려 고승 나옹이 이 절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며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절도 크게 위축되었으나 예종 1년(1469년)에 제 4대 세종과 소헌황후 심씨의 능인 영릉이 여주로 옮겨진 후 영릉의 원찰이 되어 성종 3년부터 대규모로 다시 지어졌으며 조사당은 이때 다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신륵사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과 무학의 영정이 있습니다.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로 장대석 기단에 다듬은 초석을 놓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에 사용되는 재료인 공포를 사용한 다포계 건물입니다.
지붕 가구는 오량으로 구성하였는데 대들보 위에 가로재가 정(井)자형으로 놓이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도록 한 특수한 구조입니다.
신륵사 조사당은 작은 규모이지만 공포의 형태와 가구수법이 특이하고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외관을 가지고 있는 조선 초기의 중요한 건축입니다.
조사당 앞의 향나무는 무학대사가 늘 향이 나라고 심어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명부전 뒤로 조금 올라가면 신륵사 석등이 서 있습니다.
봄 나들이를 가면, 조금만 고개를 낮추면 이렇게 작은 야생화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조사당 위로 난 계단을 올라갑니다.
이곳은 신륵사에서 입적을 한 고려말기의 승려 나옹선사의 사리를 모신 석종과 석종비, 석등이 모셔진 곳입니다.
신륵사보제존자석종앞석등(보물 제 231호)의 모습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입니다.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습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飛天像)과 이무기를 조각했습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줍니다.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석등에 새겨진 비천상과 이무기의 모습
오른쪽은 신륵사보제존자석종입니다.
보물 제 228호이며, 신륵사 뒷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입니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습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습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고 합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합니다.
왼쪽은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입니다.
보물 제 229호이며,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입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입니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고,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라고 합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입니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신륵사보제존자석종 앞에서 바라본 신륵사의 모습
다 죽은 듯한 고목에도 꽃이 피어나는 봄입니다. 극락보전의 모습입니다.
극락보전의 모습입니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숙종 4년(1678)에 지어진 후 정조 21년(1797)에 수리되기 시작해서 정조 24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화려한 팔작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며, 내부에는 불단 위에 나무로 만든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위에 화려한 닫집이 꾸며져 있습니다. 또한 영조 49년(1773)에 제작한 범종과 후불탱화가 있습니다.
극락보전 앞마당에 세워진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 225호)
이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입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습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이 탑의 정확한 층수를 알 수가 없어 다층석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습니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끕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냅니다.
맨 아랫단의 용의 발톱
용의 발톱이 몇 개나 되는지 가시거든, 꼭 확인해보세요?
부처님 오시는 날이 다가오고 있지요?
극락보전 앞 마당을 화려하게 수놓은 등.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 230호)
이쯤 되면 신륵사에는 대체 보물이 몇 개나 되는거야? 하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하지요?
이비는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습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지요.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입니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입니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입니다.
신륵사 다층 전탑(보물 제 226호)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습니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입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합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입니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습니다.
신륵사의 운치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강월헌으로 가야 합니다.
다층전탑 아래, 강변 큰 바위 위에 지어진 정자입니다. 끝없이 뻗어있는 여강, 반대쪽 강변의 넓은 모래벌판이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옛 모습을 재현한 황포돛배가 강물 위로 떠가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다층석탑과 그 아래의 강월헌의 모습을 함께 담아봅니다.
유서 깊은 사찰이라 신륵사에는 볼거리가 많은 곳이지요.
남한강따라 느긋한 여유를 느껴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자세한 길 안내를 원하시면
http://cafe.daum.net/yoeunsun 서울, 경기권을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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