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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조선 초기의 별당 건축-강릉 오죽헌

 

 강릉으로 향합니다. 강릉을 몇 번인가 들렀는데, 오죽헌을 한 번도 들른 적이 없었네요.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이라고 합니다.

옛날 오천원 권의 뒷면에 나왔던 오죽헌의 풍경이라고 합니다.

 오죽헌의 입구로 들어섭니다.

 작년에 세워졌다는 율곡 이이의 동상

<견득사의>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 고 적혀 있습니다.

 오죽헌으로 들어섭니다.

 자경문이라 적혀 있습니다.

 오죽헌과 문성사

문성사는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제각이 있었는데 1975년 정화사업 때 어제각을 서쪽으로 옮기고 문성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문성'은 1624년 인조가 율곡 선생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오죽헌

조선초기에 지어진 별당 건물로, 원형이 잘 보존된 대표적인 건축물입니다.

이 건물은 주심포 양식에서 이익공양식으로 변해가는 건축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1963년 보물 제 165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왼쪽 마루방은 율곡 선생이 6살까지 공부하던 방이며, 오른쪽 방은 1536년 신사임당이 용이 문머리에 서리는 꿈을 꾸고 율곡 선생을 낳은 방입니다.

몽룡실이라 불리우는 이 방에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오죽헌 내부

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는 강릉의 친정 어머니 최씨가 병이 나자 간호를 위해 강릉에 머물러 있을 때 오죽헌에서 신사임당을 낳았다고 합니다.

또 사임당도 서울의 이원수와 혼인을 하였으나,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강릉에서 지내다 오죽헌에서 율곡을 낳았다고 합니다.

오죽헌의 오죽 

 줄기의 빛깔이 까마귀처럼 검은 색이어서 <오죽>이라 부르며, 예부터 신성한 곳에서만 뿌리를 내린다고 하여 예부터 특별하게 여겨왔다고 합니다.

죽순은 5-6월에 나오는데 첫해에는 초록색이었다가, 다음해부터 검은색이 된다고 합니다. 60년을 산다고도 하며, 꽃을 피면 죽어버린다고도 합니다.

오죽헌이라는 이름도 율곡 선생의 이종사촌 권처균이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많은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

 안채와 바깥채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던 곳이며, 바깥채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던 곳입니다.

 바깥채의 툇마루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겨 놓은 곳입니다.

 바깥채에서 바라본 어제각의 모습

 어제각

정조임금이 1788년 율곡선생의 친필<격몽요결>과 어린시절 사용하던 벼루를 보고 책에는 머릿글을, 벼루 뒷면에는 율곡선생의 학문을 찬양하는 글을 새겨 소중히 보관하라는 분부를 내리자 이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율곡 이이가 사용하였던 벼루

 율곡 선생의 친필로 적은 격몽요결

 바깥채와 오죽헌의 모습

 바깥채에서 밖으로 나와 바라본 풍경

 바닥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맨 위의 첫사진이 오천원권에 나온 풍경이구요. 같은 풍경을 광각 렌즈로 찍어본 풍경입니다.

 오죽헌의 가로등

 입지문을 나서 봅니다.

 구석에 천하대장군과 여장군이 서 있습니다.

 향토민속관의 전경

 

 향토 민속관 마당에 신사임당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사임당(1504-1551)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시, 글씨, 그림, 자수 등에 뛰어난 예술가이자, 효성 또한 지극해 우리나라 여성상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1536-1584)

유교인 조선 성리학을 완성한 사상가, 철학자이며 정치가이다. 병조판서 때 일본, 중국의 침략에 대비해 <십만양병론>을 주창하였으며, 격몽요결을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