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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일년에 단 하루, 일반에게 개방되는 특별한 절집-문경 희양산 봉암사

 

 

 

우리 땅에서 가장 문턱이 높은 절이라고 합니다.

속인은 물론 먹물옷을 입은 스님이라고 해서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고도 하구요.

들리는 얘기론 그동안 봉암사에서 퇴짜를 맞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문턱이 높은 것일까요?

한국 불교의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불교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구산선문이 근간이 된다고 합니다.

그 구산선문중 하나가 희양산문의 종찰인 봉암사입니다.

 

일년에 단 하루,

일반에게 개방되는 특별한 절집, 문경 희양산 봉암사입니다. (2013년 5월 17일)

 

사진은 봉암사에 백등이 걸린 풍경입니다.

봉암사는 특이하게 초파일에 백등을 거는 곳이라고 합니다.

 

 

 

참선과 수행만을 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절집은 분주함 속에서도 어떤 청정함이 느껴집니다.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

1년에 딱 한 번 석가탄신일에만 산문을 연다는 비밀의 사찰입니다.

조계종 산하 2,800개의 절 중에서 유일하게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 청정도량..

 

일주문을 지나 이르면 남훈루라 적힌 누각이 먼저 여행자를 맞이해줍니다.

 

 

 

 

뒤쪽에서 바라본 누각의 모습

 

 

 

 

잘생긴 바위 봉우리인 희양산이 병풍처럼

절집을 둘러서 있는 곳입니다.

 

희양산(998m)은 문경새재에서 속리산 쪽으로 흐르는 소백산맥 줄기에 우뚝 솟은

기이하고 신령스러운 암봉입니다.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봉암사편을 보면

북한산 백운대 인수봉과 진안 마이산을 합쳐놓은 것처럼 불쑥 솟은 봉우리가 기이하기 짝이 없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최치원의 표현으로는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남훈루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하얀 백등이 걸린 대웅보전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독특하게 백등이 걸린 절집, 문경 봉암사..

 

 

 

 

봉암사는 신라 49대 헌강왕 때인 897년 지증 도헌 국사가 창건했습니다.

전해오는 봉암사 창건 이야기는 신심이 깊은 심층이란 신도가 있었는데,

지증국사의 높은 도명을 듣고 찾아가

“제자에게 여분의 땅이 있는데 희양산 중턱 봉암계곡에 있습니다.

경계가 눈 가는 데까지 다 포함하오니 바라건대 절을 지으십시오!”라고 간청했다고 합니다.

이에 지증국사가 와서 보니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창건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봉암사는 우리나라 스님들이 평생에 꼭 한 번 찾으려는 정신적 고향이 되었습니다.

구산산문의 산실로 한국불교의 흐름 속에서 숱한 사건들을 겪으며

고고한 선풍을 유지해 온 곳이라고 합니다.

 

 

 

 

봉암사에 도착하고 보니 12시가 넘은 시간입니다.

출출해진 여행자, 본격적으로 봉암사를 둘러보기 전에 점심을 먹기로 합니다.

이날 절집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

절집 점심 공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척이나 긴 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5분쯤 기다려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산채 비빕밥에 미역국 한그릇,

절집의 밥으로 넉넉한 인심이로군요.

 

 

 

 

이곳은 철쭉도 흰철쭉들을 심어 놓았네요.

철쭉 환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계절의 봉암사입니다.

 

 

 

 

절집의 시원한 물도 한모금 마시고

쉬엄쉬엄 돌아보는 봉암사입니다.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극락전입니다.

법주사의 팔상전, 화순 쌍봉사의 대웅전과 함께 목탑형식을 간직한 불전이지요.

 

 

 

 

17세기에 불에 탔다가 다시 중건됐을 때 옛모습대로 복원하지 못하고, 형식만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층지붕을 한 극락전은 아무리 봐도 잘 생겼습니다.

 

지붕 꼭대기의 석탑 형태가 눈길을 끕니다.

 

 

 

 

이곳은 신라 마지막 경순왕이 피난와서 원당으로 사용한 곳이라고 합니다.

내부에는 어필각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곳입니다.

 

 

 

 

극락전을 지나면 나란히 대웅보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 대웅보전 앞에 걸린 백등을 담습니다.

 

이곳에 백등이 걸린 이유는

수행 할 시간도 모자라기에 언제 연잎을 만들겠으며,

영가를 위해 백등을 단다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차별없이 밝히기를 원하는 의미라고도 합니다.

 

 

 

 

봉암사는 무엇보다 성철스님을 비롯한 선(禪) 지식들이

1947년 이곳에서 결행한 ‘봉암사 결사’가 유명합니다.

 

당시 성철, 청담, 자운, 월산, 혜암 등 고승들은 오직

‘부처님 법(진리) 대로만 살아보자.’고 결의하고

세속을 떠나 직접 일하고 탁발을 하면서 수행 전진한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때 성철스님이 ‘共住(공주)규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주요 내용은 ‘삼엄한 부처님 계율과 숭고한 조사의 유훈을 부지런히 닦고 힘써 실행하여 구경의 큰 결과를 원만히 빨리 이룰 것을 기약한다.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각자의 사견은 절대 배척한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은 자주자치의 표지 아래에서 물 기르고, 땔나무 하고, 밭에 씨 뿌리고, 또 탁발을 한다.

앉는 차례는 비구계 받은 순서로 한다. 방 안에서는 늘 면벽좌선하고 서로 잡담을 금한다.’ 등 이었다고 합니다.

 

 

 

스님들은 밥 해주는 공양주, 땔나무 마련하는 부목(負木) 처사부터 내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이라는

불교 전통의 청규(淸規) 정신에 따라 손수 먹거리를 구했습니다.

 

도반(道伴·함께 도를 닦는 벗) 앞에서 스스로 죄를 자백하는 포살(布薩),

현재의 괴색(壞色·검붉은 자목련색) 승복, 신도들이 스님에게 삼배를 올리는 예법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수행자들이 밭을 일구고 지쳐 선방에서 졸기라도 할라치면

“밥값 내놔라, 이놈들아!”하는 성철스님의 호통이 희양산을 쩌렁쩌렁 울렸다고도 하지요.

 

 

 

 

일제의 영향, 토착 기복신앙 등으로 혼탁해진 불교계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올곧게 참선 수행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봉암사 결사였다고 합니다.

 

땅에 떨어진 승풍(僧風)을 회복한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붉은 작약과 흰등이 어우러진 풍경이 눈길을 붙듭니다.

 

 

 

 

수수한 모습을 한 등,

볼수록 눈길을 끕니다.

 

 

 

 

산문을 아예 걸어 잠근 것은 1982년.

 

먹고 살 만하니 관광객들이 몰려와 수행에 지장을 주자,

죽기 살기로 수행하던 수행자들이 지팡이와 곡괭이를 들고 희양산을 막았다고 합니다.

전국에 딱 하나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도량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이때부터 봉암사가 조계종의 특별수련원이 됐다고 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정체성을 계승하는 사찰,

‘사월 초파일’ 하루만 공개하고 364일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제8교구 직지사 말사인 봉암사..

 

 

 

 

전국 각지에서 禪 수행을 위한 최고의 선승들이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수행을 정진하기 위해 찾는 정신적, 상징적 절집.

 

그리고 하루 세 번의 공양, 세 번의 예불, 14시간 이상의 좌선,

그리고 결사의 뜻을 이은 울력(공동노동)은 모든 수행자가 해야 하는 곳, 

이곳은 봉암사입니다. 

 

 

 

 

백등이 걸린 안마당을 지나 대웅보전으로 오릅니다.

 

 

 

 

대웅보전 처마끝에는 희양산 봉우리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대웅보전을 지나면 지증대사탑과 지증대사탑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보호각 안에 자리한 탑과 탑비입니다.

 

 

 

 

보물 137호인 봉암사 지증대사탑

 

봉암사를 처음 건립한 지증대사의 사리가 모셔져 있습니다.

팔각원당형의 이 탑은 신라 헌강왕 8년(882)에 세워졌으며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부의 장식 조각이 섬세하고 수려하게 제작되어

신라 사리탑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탑의 높이는 3.41m. 지대석의 너비 2,28m의 당당한 탑입니다.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지증대사탑을 담습니다.

비록 지붕돌 한쪽이 깨어졌지만

장중한 형태와 섬세한 조각으로 그 아름다운 모습을 지금도 보여줍니다.

 

 

 

 

지증대사탑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지증대사탑비입니다.

국보 315호로 지증대사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신라 경애왕 원년(924)에 건립된 것입니다.

 

비문은 고운 최치원이 지었으며 글씨는 분황사의 승려 석혜강이 썼습니다.

 

 

 

 

용모양의 비머리와 귀부를 완전히 갖춘 비석입니다.

 

 

 

 

뒤쪽엔 대웅전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앞쪽에는 금색전이란 현판이 걸려 있던 전각

 

금색전이란 금색인을 모시는 집이라는 뜻이며

금색인은 부처님을 가르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법고와 목어가 자리한 범종각도 지나고

 

 

 

 

굴뚝과 어우러진 바심이에도 눈맞춤을 하며 걷습니다.

 

 

 

 

9세기에 만들어졌다는 봉암사 삼층석탑은

수리중이로군요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창건할 때 세운 것이라는데

볼 수 없으니 아쉬움이 남습니다.

 

 

 

 

금색전 뒤로 가면

 

 

 

 

외인출입금지란 문패를 단 문이 보입니다.

 

 

 

 

이곳이 선원이로군요

희양산문태고선원이란 편액 밑에 돌사자가 지키고 있는 곳입니다.

 

 

 

 

봉암사 태고선원(太古禪院)은 전국의 선방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합니다.

안거철이면 80∼100명의 선승이 함께 수행 정진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선원의 모든 수행자들은 엄격한 수행청규를 따라야 하고, 개인 공간도 개인 시간도 없다고 합니다.

갓 들어온 사미승이건 30여 년을 이곳에서 수행해 온 선원장 스님이건 모두 완벽한 공동체 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보통 일반사찰에서는 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를 각각 3개월을 수행하고,

나머지 기간은 해제하나 봉암사는 해제 기간 없이 계속 참선과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고 합니다.  


 

 

 

고개를 들어보면 희양산 봉우리가 바라보이는 곳

 

 

 

 

저 담너머에서 수많은 세월,

수많은 선승들이 수행하고 공부한 곳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더 청정하게 느껴지는 곳입니다.

 

 

 

 

수행에 정진하던 스님들도

초파일 하루만은 백등을 달고, 손님맞이를 합니다.

 

산문이 열리는 하루..

향내 묻어나는 목탁소리 벗 삼아

세상시름을 잊어 볼 수 있어 하루가 호사스럽습니다.

 

문경 희양산 봉암사 찾아가는 길

중부고속도로 문경새재IC-901번 지방도를 타고 문경석탄박물관을 지나 좌회전-봉암사 이정표- 봉암사

초파일에도 봉암사 입구부터는 차량 통행금지더군요

차를 길가에 주차해놓고 셔틀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