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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만나는세상

종교를 초월한 대지혜-남회근 선생의 금강경강의

 

 

 

 

종교가 불교는 아니지만,

한번 쯤 읽고 싶었던 금강경..

 

한 권 구입해서 읽어보려고 하니 책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무얼 골라야 할지..

주변 분들께 여쭤보니 이구동성으로 권하는 책,

남회근 선생이 짓고, 신원봉 선생이 옮긴 금강경 강의를 권하십니다.

 

주문하고 받고보니 거의 700페이지에 이르는 책,

쉬엄쉬엄 읽어갑니다.

 

읽다가 앞부분이 생각나지 않으면 다시 앞으로 가 읽고 오고..

그러느라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어쩐지 '도'에 한발짝 더 다가간 느낌입니다. ㅎㅎ

 

 

불경 중에서 <금강경>만큼  영향력이 큰 경전은 없었습니다.  

천여 년 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경전을 연구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경전으로부터 감응을 받고 도를 이루었는지 모릅니다.

<금강경>은 불경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경전입니다.

<금강경>이 참으로 위대한 것은, 전혀 종교적 색채를 풍기지 않으면서도 모든 종교를 그 속에 다 포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남회근 선생의 강의에 들어가며 중에서-

 

선생의 말씀대로 전혀 종교적 색채를 풍기지 않으면서도

모든 종교를 그 속에 다 포함하고 있는 책이더군요.

 

책은 32품까지 나뉘어져 있으며 하나의 명제에 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강의에 들어가며

제1품 법회가 열리게 된 원인〔法會因由分〕
제2품 수보리가 일어나 법을 청하다〔善現啓請分〕
제3품 대승의 바른 종지〔大乘正宗分〕
제4품 불법의 수행은 머무름이 없는 것이다〔妙行無住分〕
제5품 여래를 보다〔如理實見分〕
제6품 바른 믿음이 드물다〔正信希有分〕
제7품 얻은 것도 없고 말한 것도 없다〔無得無說分〕
제8품 일체의 부처가 이 법으로부터 나온다〔依法出生分〕
제9품 어떤 깨달음도 깨달음의 상이 없다〔一相無相分〕
제10품 장엄한 정토〔莊嚴淨土分〕
제11품 무위의 복이 더 낫다〔無爲福勝分〕
제12품 바른 가르침을 존중하다〔尊重正敎分〕
제13품 법대로 수지하다〔如法受持分〕
제14품 상을 떠난 적멸〔離相寂滅分〕
제15품 경을 지니는 공덕〔持經功德分〕
제16품 업장을 깨끗이 할 수 있다〔能淨業障分〕
제17품 궁극의 경지엔 내가 없다〔究竟無我分〕
제18품 일체를 똑같이 보다〔一體同觀分〕
제19품 법계를 두루 교화하다〔法界通化分〕
제20품 형체를 떠나고 상을 떠나다〔離色離相分〕
제21품 어떤 법도 말로써 설명할 수 없다〔非說所說分〕
제22품 아무 법도 얻을 것이 없다〔無法可得分〕
제23품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다〔淨心行善分〕
제24품 복과 지혜는 비교할 수 없다〔福智無比分〕
제25품 교화함이 없는 교화〔化無所化分〕
제26품 법신은 상이 아니다〔法身非相分〕
제27품 끊음도 없고 멸함도 없다〔無斷無滅分〕
제28품 받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는다〔不受不貪分〕
제29품 위의가 고요하다〔威儀寂靜分〕
제30품 이치와 현상의 일합상〔一合理相分〕
제31품 지견이 생기지 않는다〔知見不生分〕
제32품 모든 교화는 참된 것이 아니다〔應化非眞分〕
총결론
후기

책 속의 구절들 중에서 몇 구절 모셔와봅니다.

 

종교를 초월한 대지혜

소위 반야라는 것은 보통의 지혜가 아니라 도(道)를 이해하고 깨닫고 닦어서 증험할 수 있으며,

생사를 초월하여 초범입성(超凡入聖) 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합니다.

...

반야라고 하는 이 지혜에는 다섯 종류의 각기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일러 5반야라고 합니다.

첫째는 실상반야요. 둘째는 경계반야, 셋째는 문자반야, 넷째는 방편반야, 다섯째는 권속반야입니다.

이 다섯 가지 의미를 모두 포괄한 개념이 바로 금강반야입니다.

 

그리고 책은 이 다섯가지의 반야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머무는 바가 없도록 하는가

대승불법에서는 어떻게 해야 비로소 편안히 머물 수 있느냐에 대해

'머무름이 없는 것이 곧 머무름입니다"

수양이 이 경계에 이르면 이것이 바로 여래로서, 마음이 거울처럼 맑고 깨끗합니다.

주관도 없고 선입견도 없어서 사물이 오면 응합니다.

어떤 일이 있으면 이 거울이 바로 반응합니다.

희로애락이 있으면 희로애락에 젖지만, 지나가면 일체 남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

잠이 많으면 꿈도 많으나, 꿈에서 깨고 나면 그 꿈은 머물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인생은 원래 한바탕 꿈입니다. 모든 일은 한 번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강물이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

번뇌란 본래 공(空}입니다.

모든 희로애락과 번뇌는 바로 여기에 자리를 잡는 그순간에 모두 없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기러기가 긴 허공을 가르다

인생은 도처에서 무엇과 같다고 아는가

마땅히 나는 기러기 눈 밟듯 해야 하리

눈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더라도

기러기 날아가면 다시 어찌 동서를 알리

 

소동파는 말합니다. 한평생은 무엇과 같은가? 눈오는 날의 새와 같습니다.

설사 잠시 땅에 발자국을 남기더라도, 날아가고 나면 다시 눈이 내려 발자국을 덮어 버립니다.

 

비상(非相)과 공(空)

부처는 형상으로써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 주의하십시오~ 부처는 형상으로써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형상으로 부처를 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절에서는 왜 우상을 숭배하느냐고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잘못된 겁니다. 진정한 불법은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를 반대합니다.

그런데도 왜 그려 놓은 부처나 새겨 놓은 보살 상에 절을 할까요?

그것은 부처나 보살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공경심을 끌어내기 위함입니다.

절을 하는 것은 그림이나 조각에 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 다른 사람이 자신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구합니다.

일념으로 공경심을 다했다면, 그림이 진짜 부처니 아니니 말할 필요 없습니다.

... 부처는 말합니다. 그것은 "나로 안해 그대들이 공경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아 버리다

금강경 전부는 소위 조사들이 말하는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긍정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반야의 체상을 깨달아 스스로 긍정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 성불해서 도를 보는 것은 타력에 의지할 수 없으며 단지 홀로 서서 진정으로 스스로를 끊어 버린 후 소생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불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아 버려야 합니다,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단지 세간 일체의 것을 버릴 뿐 아니라 불법마자도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밑줄 그어가며 읽었던 금강경 강의,

책은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습니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긍정하는 것을 가르치는 금강경..

석가모니 부처와 제자 수보리의 대화로 우리에게 들려주는 금강경입니다.